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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22. 2024

장벽과 붉은 사다리

붉은 사다리는 리프트 위에 얹혔다. 리프트는 제리의 지시대로 화물칸에서 운전석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바짝 붙여 놓였다.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 많았다. 특히 페퍼. 그녀는 방에 들어가서 한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술을 마시는 사람은 없었다. 담배와 커피도 그랬다. 모두가 이완을 바랐다. 소년은 어른들의 묵직한 기류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어서 쟝이 자기 덩치만 한 공구함을 들고 나왔고, 카리브는 붓과 물감, 이젤을 등에 메고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은 적당했다. 딘은 그동안 모아 두었던 약이 든 작은 유리병을 한 개비의 시가가 담긴 주머니 반대쪽에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딘은 홀로 서 있는 소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의 작은 손을 잡으며 말했다.


“괜찮아?”


소년은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을 하고 있다기보다는 풍경을 살피는 모습이었다. 딘은 말했다.


“우습다고 생각하고 있지, 너.”


그 말에 소년이 입을 열었다.


“아니요.”


“그럼, 왜 그렇게 멍하게 있어.”


“다들 이렇게 있길래요.”


“그 이유가 아닌 것 같은데.”


“아니에요. 그래서 궁금해하고 있었어요.”


“뭐를?”


“다들 죽음이 두려운 걸까, 라고요.”

     

그리고 페퍼가 차고에서 나왔다. 방금까지만 해도 커져 있던 동공이 작아져 있는 걸 보아, 그녀는 약을 먹은 게 분명했다. 페퍼의 옷차림은 처음 펍에서 입었던 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아마도 당시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거나, 이 일행이 무탈하게 펍에 다시 모일 수 있기를 바라는 의미일 것이다.


“준비됐어요.”


페퍼가 말했다.


“출발할까요?”


운전석에 있는 제리가 트럭의 열쇠를 손으로 잡으며 물었다. 딘은 소년을 흘깃 보고는 코트의 어깨를 툭툭 털며 말했다.


“가시죠.”


조수석에는 딘이, 그 가운데에는 소년이, 뒷좌석에는 카리브, 쟝, 페퍼 순으로 자리를 차지했다. 1번지의 새벽 도로는 무척이나 깜깜했다. 어딘가에서 작은 동물이 튀어나오거나, 사람이 불쑥 나타난다면 비명 한번 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 정도의 어둠이었다. 화물 칸에선 계속해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딘은 제리에게 속도를 조금 늦추라고 말했지만, 제리는 이게 최대한 느리게 달리는 것이라며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한 사람씩 말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쟝.”


딘은 전조등의 불빛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조금 떨리는걸.”


“왜?”


“이것 봐. 또 알면서 모르는 척하잖아. 너는 이번 기회에 그 나쁜 버릇 좀 고쳐야 돼.”


“못 고쳐. 불치병이야.”


그리고 카리브가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는 사실 조금 설레는 중이에요.”


그 말에 딘과 쟝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어머, 그렇게들 쳐다보지 마세요. 저도 어디까지나 그림쟁이일 뿐이라고요. 그리고, E구역이 어떻게 변했는지, E와 D구역 사이에도 여기와 같은 장벽이 지어졌는지 궁금하잖아요? 그래서 저, 망원경까지 챙겼어요!”

     

“변태.”


소년이 말했다.


“뭐?!”


“그런 걸 그려서 뭣 하려고요. 그냥 눈으로 보세요. 눈으로 느껴지는 황홀감이 그림보다 몇 배는 더 아름답게 느껴지실걸요?”


카리브는 팔을 뻗어 소년의 머리를 헝클이며 말했다.


“그래, 너 잘났다.”


그리고 카리브는 어린아이에게 찔린 곳이 아프게 느껴졌던 건지 소년의 머리카락을 계속해서 헝클어뜨렸다.


“근데, 소년아.”


“네?”


“그림도 보고 있으면 황홀감이 느껴진다?”


“설마요.”


소년이 머리를 정돈하며 대답했다.


“진짜. 너, 제대로 된 그림 본 적 없지.”


“있어요! 58번지에서! 거긴 온통 그림뿐이라고요!”


“야. 그런 건 그림이 아니라 낙서라고 하는 거야.”


“낙서도 그림이에요. 지금 그림 조금 그린다고 잘난체하시는 거예요?”


“야! 그 말이 아니잖아!!”


카리브의 고함에 모두가 웃었다. 페퍼도 피식하고 웃음을 비쳤다. 그리고 어느덧 트럭이 달린 지 20여 분째, 서서히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날이 밝아질수록 사람들의 웃음기는 사라져 갔고, 다시 처음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페퍼가 유독 많이 떨었다. 그녀의 손엔 이미 약통이 쥐여 있었다. 물안개처럼 저며 있던 어둠이, 이제 빛에 절반의 공간을 내줄 정도가 되었다. 장벽이 보인다.


“곧장 붙이겠습니다.”


제리는 전조등의 밝기와 트럭의 속력을 짧은 시간 내에 전속력으로 올렸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하늘의 별 하나가 트럭과 비슷한 속도로 움직였다. 제리는 벽과 평행하게 트럭을 세우자마자 시동을 꺼뜨렸다. 그리고 어두운 장벽 아래, 분주한 움직임들이 이어졌다. 차에서 내린 딘은 곧장 제리에게로 가서 말했다.


“최소한의 조명은 남겨 둬야 하지 않을까요?”


제리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됩니다. 곧 날이 밝을 거예요.”


“리프트에 올라 사다리를 설치하려면 조명이 필요합니다. 아직은 너무 어두워요.”


“인근의 사람들이 알아채는 순간엔 모든 게 끝입니다, 딘 씨. 다른 선택지가 없어요. 그리고, 리프트를 작동시키면 시야가 트일 만한 작은 조명이 바닥에 붙어 있습니다.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의 방법인 것 같군요.”


딘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일은 고요함 속에서 떨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뿐이었다. 소년은 시티의 대도답게 여유가 넘쳤다. 딘은 소년의 손을 꼭 잡고서 페퍼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내밟았다.


“긴장되시죠?”


페퍼는 입술을 깨물며 웅얼거렸다. 그녀의 이가 아랫입술을 조금이라도 놓치는 순간에는 한겨울의 헐벗은 여인처럼 떨림이 심했다. 딘은 그러지 말라며 말하려다, 눈을 감고 입술에 침을 적셨다.


“저도 긴장이 됩니다, 페퍼 씨. 여기 있는 누구보다 더요.”


딘의 말을 들은 페퍼는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입니다. 아까 차에서 심박수를 재어 보니 거의 160에 가깝더군요.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 그리고 페퍼 씨뿐만도 아닐 거고요. 모두가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려는 일은 뭐랄까…, 좋은 곳이든, 나쁜 곳이든, 기록이 될 일이니까요.”


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리프트에 불이 들어왔다. 딘은 고개를 돌려 제리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다시 페퍼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안정제를 너무 많이 드시진 마세요. 행여 잠이라도 들어 버리면, 좋은 경치를 놓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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