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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23. 2024

마지막, 장벽

결국 페퍼는 함께하지 못했다. 제리의 곁을 지키기 위해 남았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리프트가 사다리를 향해 오를 때, 헷이 이끄는 1번지의 주민들이 트럭 코앞까지 덮쳤다. 제리는 헷의 머리 위로 경고탄을 쏘았다. 그리고 사다리에 매달려 있던 딘을 포함해 리프트에서 대기하고 있던 쟝, 카리브, 소년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퓨티!!!”


카리브가 소리쳤다.


“저 망할 새끼는 또 뭐야.”


그리고 쟝은 사다리에 올라 있는 딘을 향해 말했다.


“이봐, 딘! 퓨티와 워블 씨야!”


딘은 이를 갈며 헷을 내려봤다.


“저놈이었던 거군.”


“그래! 퓨티와 워블 씨는 우리의 제안을 거절한 게 아니야! 저놈한테 납치됐던 거라고!”


“형제라고 했던 거 기억해? 쟝?”


“뭐야. 그럼, 그때 네가 날린 대갈통이 동생이었다고?”


“그런 것 같아. 그놈은 멍청했거든.”


그리고 옆에서 카리브가 발을 동동 굴렀다.


“이제 어쩌죠? 저들을 구해야 하지 않나요? 방법이 없을까요?”


딘은 단호히 대답했다.


“저 사람이 바라는 건 우리가 아래로 내려가는 걸 겁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우리는 저놈에게 패배한 셈이 되는 거죠.”     


“퓨티와 워블 씨를 죽게 놔둘 순 없어요.”


“아니요.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어려운 결정을 쉽게 말씀하시네요.”


“이게 최선의 결정이니까요. 그리고 저 녀석은 두 사람을 죽이지 못합니다. 사람들을 선동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살인자로 낙인이 찍히는 순간엔 모든 이들이 저 인간을 경계할 테니까요. 스스로도 잘 알 겁니다. 상대에게 내민 칼이 되려 자신의 몸을 관통할 수 도 있다는 걸요. 또한 저는, 이대로 내려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때, 소년이 입을 열었다.


“장벽을 올라야 해요!”


“목표를 정했으면, 희생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배웠어요. 저 또한 저기 있는 누나들처럼 희생양이 되었더라도 이쪽을 응원했으면 했지, 목표를 포기하는 걸 바라진 않았을 거예요.”


그에 쟝이 말했다.


“이놈 봐라. 말솜씨가 점점 늘어나는데?”


“딘, 나는 이 녀석 말에 찬성이야.”


딘은 애초에 반대쪽에서 의견을 제시하고 있지 않았다. 선택의 고통을 떠안고 있는 건 카리브 혼자뿐. 카리브는 심장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귀가 울리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붉은 홍조와 함께 땀이 맺히는 느낌까지, 모든 게 긴장의 신호였다. 그 끝없는 혼돈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대포처럼 날아왔다.


“카리브다!!!”


그 목소리에 딘은 조용히 미소를 훔쳤다. 그리고 시선들이 움직였다. 가더와 연루돼 있던 인간들이라면 카리브의 얼굴을 모를 수 없다. 그의 말이 있고 난 뒤, 이곳저곳에서 목소리가 튀어 올랐다.


“카리브?”


“카리브라고?”


“그 카리브를 말하는 거야?”


“닮은 사람이겠지.”

     

“아냐, 정말 카리브야. 내가 직접 봐서 알아.”


헷 또한 카리브를 모르지 않았다. 그는 채찍을 쥔 손의 힘이 풀릴 만큼 놀란 듯했다. 어째서, 라는 말과 함께. 그러나 그는 강인했다. 헷은 제리의 총구를 힐끗 보고는 앞으로 걸음을 내밟기 시작했다. 제리는 다시 한번 경고 사격을 날렸다. 총알이 헷의 이마 옆을 스치며 지나갔다. 피부가 터졌고, 왼쪽 눈 아래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헷은 계속 걸었다. 그리고 제리의 장전 소리를 들은 헷은 거기서 멈춰 섰다.


“카리브 씨!!! 당신이 왜 거기 있는 겁니까!!!”


그 목소리에 퓨티는 고개를 들었다. 풀린 눈으로는 볼 수 있는 게 한정적이었지만, 소년만큼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헷과 카리브가 한창 말을 나누는 사이, 퓨티는 뒤를 슬쩍 흘겼다가 워블을 깨웠다.


“워블 씨, 소년이에요.”


“…어디?”


“저기 사다리 아래예요. 장벽을 넘을 준비가 모두 끝난 것 같아요. 소년도 무사하고요.”


“무사하다고요?”


“네.”


“…그것참 다행이네요. 줄곧 그 생각만 했었는데.”


“제리 씨께서 트럭을 지키고 계세요. 아마 페퍼 씨와 마찬가지로 장벽에 오르지 않을 모양이에요. 그리고…”


총을 지니고 있어요, 라고 퓨티는 말했다. 워블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퓨티는 워블과 같은 자세로 땅에 엎드렸다.


“아직도 모르겠어요? F구역은 버려진 거라고요!!”


카리브가 소리쳤다.


“그들이 물러난 지 한 달이 지났어요! 공급이 끊겼습니까? 공급되는 물자들이 여전히 우리의 배를 채워 주고 있는데, 그걸 당신이 어떻게 확신합니까?!! 저희는 버려지지 않았습니다!!”


“공급이 끊기면 어떡할 건가요? 전기와 수도, 가스가 끊기면 이곳은 일주일도 버티지 못할걸요?”


“그럴 리 없습니다. 저들은 우리를 버리지 않았어요.”

     

“왜 자꾸 그러는 거죠?”


카리브가 물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헷이 되물었다.


“버려졌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잖아요.”


“…그건!”


“부정하고 싶은 거군요?”


헷은 움찔거렸다.


“그래,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지금 당신과 저의 위치가 이렇게 돼 버린 게. 당신도 처음부터 악한 사람은 아니었겠죠. 사람의 목에 목줄을 걸 만큼.”


딘은 다리에 힘을 실어 사다리와 구멍 사이로 스며든 접착제의 유격을 확인한 다음, 리프트에서 벗어나 사다리에 올랐다. 그리고 이어서 소년, 쟝, 카리브가 사다리에 발을 올렸다. 1번지 주민들이 일제히 요동쳤다. 멍청이들은 당장 거기서 내려오라고 이야기했다. 반면, 솔직한 사람들은 절규했다. 헷은 쇠사슬을 내려놓고서 멍청이들을 이끌고 제리를 향해 돌격했다. 제리는 조수석에 앉아 있는 페퍼를 향해 시동을 걸라고 신호를 보냈다. 트럭에 시동이 걸리고, 헷을 필두로 한 멍청이들이 금세 트럭을 덮쳤다. 제리는 제일 먼저 트럭에 도착한 사람을 총으로 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발은 리프트를 붙잡고 있는 밧줄에 날렸다. 제리는 운전석에 미처 오르지 못했다. 무게가 실린 트럭이 좌우로 흔들렸다. 리프트가 쓰러졌고, 짐칸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어서! 빨리!”


장벽 위에 올라선 딘이 소년을 향해 팔을 뻗으며 외쳤다. 소년이 오르고, 쟝이 오르고, 카리브가 올랐다. 딘은 소년을 가장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탕.’


모두가 넋을 놓고 아래를 보고 있을 때, 왼편 끝에서 울린 총성이었다. 그리고 다시 모두가 넋을 놓고 그곳을 바라봤을 때, 소년이 양 무릎을 꿇은 채로 앞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탕.’


또 한 발의 총탄이 소년의 배에 날아와 박혔다. 모두를 둘러싼 극도의 고양감은 단 두 번의 총성과 함께 하늘로 사라졌다. 무리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이성을 되찾은 건 쟝이었다.


“이런 망할!! 다들 엎드려!!!”


카리브는 몸을 숙인 채로 소년에게로 달려갔다.


“딘!! 뭐 하고 있어! 당장 몸을 숙여!!”


딘은 쟝의 목소리를 못 듣지 않았다. 다만 바라볼 뿐이었다. 왼쪽 어깨와 오른쪽 아랫배를 관통당한 소년을.


“살아야지, 딘! 살아야 하는 거라고!! 소년은 아직 죽지 않았어!! 네가 혼이 나가면 우리는 끝장이야!!!”


쟝이 울부짖다시피 소리쳤다. 그러나 딘은 움직이지 못했다. 딘은 여전히 귓가에서 총성이 들렸다. 힘겹게 올랐던 노력의 장면들은 산산이 부서졌고, 소년을 노린 저격수와 소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피, 그리고 목놓아 절규하는 카리브의 울음소리만이 딘의 머릿속에서 꿈틀거렸다. 거기서 쟝이 딘의 목덜미를 잡고 내리꽂지 않았더라면, 딘은 소년 다음으로 저격수의 총탄을 맞은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쟝은 넓은 손바닥으로 감싼 딘의 얼굴을 바닥에 밀어 넣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닥치고 내 말 똑똑히 들어!!”


딘은 힘없이 쟝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살 수 있어. 네 선택에 달린 문제야. 우리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가고자 한 곳이 어디까지였는지, 그걸 생각해야만 하는 시점이야.”


“…목표?”


“그래, 목표. 겁쟁이 이상주의자들이잖아, 우리는. 잊었어?”


쟝의 말에 딘은 허탈하게 웃음 지었다.


“틀렸어, 쟝.”


그리고 딘은 몸을 돌려 검은 하늘을 보며 말했다.


“우린 용감해. 더할 나위 없이.”


“진짜 겁쟁이들은 저기에 있는 것 같아. 어른이 아닌 아이부터 노렸잖아. 저 겁 많은 개새끼들이 말이야.”


그리고 딘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E구역 아래로 몸을 던졌다.


“우리가 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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