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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위스 아주미 Jun 26. 2024

공산국가에서 자란 폴란드인 남편 설득해 집 산 썰

네? 집값의 80%를 대출해 준다고요? (2)

얘기는 불쑥 꺼내놓고 지난 일주일 동안 이런저런 일로 바쁜 와중에도 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내가 인스타를 그만 두기로 한 이유이기도 한 모든 포스팅은 자랑으로 통한다고, 진솔하게 하고  싶은 나의 이야기를 G자랑으로 볼까 싶은 두려움이 있었다. 참고로 인스타 자랑 포스팅 단골 멘트로: 어제 먹고 잤더니 부은 얼굴 무엇? (속뜻: 퉁퉁 부어도 이쁜 나), 남편 기다리는 중 (속뜻: 우리 차 예쁘지? feat. 무심한 듯 시크하게 빼꼼 나와 있는 Mercedes Benz 로고).. 등등. 나도 마이 해봤다. ㅎㅎ


자랑이 아니라고 난 나의 일상을 기록하는 것뿐이라고 하기엔 남에게 보이고 싶은 순간들만 보여주기에 어느 순간 왜곡되어 보일 나의 삶이 불편해졌다. 뭐, 그리 대단한 삶도 아닌 평범한 일상이지만, 살면서 느끼는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어려웠어요. 누군가에겐 나의 포스팅이 자랑질이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재밌자고 하는 일에 이렇게 생각이 많아질 일인가? 를 느낀 순간,  싸이월드-페이스북-인스타그램 계보로 이어졌던 SNS의 대장정을 이쯤에서 마쳐야겠다 생각했다. 난 이만 하산하련다. 그동안 즐거웠소.

Guten Morgen,  지금 내가 있는 이 곳

부. 동. 산.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는, 또 대단히 민감한 주제라 말 한번 잘못했다가 뭇 대중에게 물어뜯기기 딱 좋아서 말 가려해야 하는 주제라는 부동산. 보통 사람 스위스 아주미의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나의 이야기 한번 들어 보실라우?


내 소유의 집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처음 해야 할 일은 남편 설득이었다.

이전 글들에서도 밝혔듯이 내 남편은 고등학교 때까지 폴란드에서 공산정권 시절에  배급받은 빵으로 끼니를 근근이 이어가며 굶주린 배에 밀가루 칠했던... 은 오바스러운 내 상상 속의 공산국가이고, 사실 폴란드의 공산주의 시절에는 인민 동지님들 살기에 그다지 부족하지 않게 먹을 것 다 먹고, 입을 것 다 입었다 한다. ㅎㅎ


어쨌든 사유재산이 없었던 공산주의 시절에 자란 내 남편은 나의 집을 사야겠어 발언에 집이 있으면 관리에 돈을 더 쓰네, 이사가 자유롭지 않네, 일이 복잡하네, 심지어 그런 건 다 검은돈으로 거래되는 거네(!)까지.. 나참,  지금 쓰면서도 고구마 100개 물 없이 먹은 기분을 나에게 선사해 등짝을 참 많이도 맞았었다. 남편을 설득하려면 일단 좋은 집을 많이 보여줘야겠다 싶어 내 마음대로 부동산 사이트 다니면서 맘에 드는 집이 있으면 연락해 집 보는 약속을 잡았다.


우리 남편만 그런가 남자들이 원래 그런가? 토마쓰는 너무 쪼아대면 더 어긋나는 스타일이라 여기서 여우짓이 좀 필요했으니, 열심히 일해서 예쁜 보금자리를 마련해야지!라는 잔소리 백번보다는 본인 눈으로 보고 본인이 원하게 만드는 것이, 마치 이 모든 게 토마쓰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라는 판을 짜는 게 전지적 아내 시점 나의 미션, 큰 그림이었다. 아오 공산당 남편 힘들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ㅎㅎ


집을 보면 뭐 해, 살 돈이 없는데.라는 남편의 말에 일단 보러 가자. 맘에 들면 내가 사줄게라고 센 척도 해가며(에미나이, 후라이 까지 말라) 보던 와중에 일단 돈을 모아야겠다 싶었다.

그 당시 나는 장장 11년의 가방끈 늘리기 프로젝트를 마치고 갓 일하기 시작한 늦깎이 사회초년생. 그동안 아빠돈으로 살다가 처음으로 내 돈이 생기니 월급 탕진하는 재미가 쏠쏠하던 30대 초반 녀자 예술가, 남편은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 따박따박 하나씩 지르시고 여행 다니길 좋아하는 인민동지 (남편, 한글 부디 배우지 마!ㅎㅎ).


이래선 안 되겠어. 나라도 정신 차리자 싶었다.

남편은 통제를 싫어하는 사람이니 내 월급을 모아야겠군. 나는 큰 그림을 위해서라면 소소한 소비쯤 안 할 자신 있었다. 원래도 정말 원하는 게 아니면 뭘 잘 사지 않는 편이다.




그 시점에 찾아간 은행.

스위스 은행은 뭔가 인테리어부터가 위엄이 있다. 우리가 거래하는 은행은 루체른 호숫가 시내에 오래된 건물로 입장 시 높은 층고와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기분이 든다. 입구에 서 있으니 정장차림의 젊은 여성이 와서 물어본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호갱님? (아 맞다, 고객님)


은행 가면 괜히 헐벗은 듯 뭔가 작아지는 느낌, 저만 그런가요? 이건 재산의 정도를 떠나 가족끼리도 오픈하지 않는 재정상태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을 것만 같은 은행원 앞에 지극히 사적인 영역을 드러내는 순간으로 나로서는 산부인과 검진만큼이나 난이도가 있는 행위이다.

우리의 재정상태를 분석한 은행원은

너희가 사고 싶은 집값의 최소 20%를 Down Payment 현금으로 가져와.

라고 했다. 1억짜리 집을 사고 싶으면 최소 2000만 원.


흠. 할만하겠는데?


그로부터 열심히 돈을 모았다.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 잠시 미래의 큰 그림을 위해 미뤄두고 열심히 참 열심히 일했다. 나도 남편도 하루종일 저녁때쯤이면 그 좋아하는 수다 떨 에너지도 없을 만큼 녹초가 되어 서로를 보며 엷은 모나리자 미소만 짓는 날도 있었고, 라헬이 태어나고 (모나리자 미소를 지었을 뿐인데  아이가 태어나는 매직) 남편이 시작한 사업 초기에는 토마쓰가 라헬 밤중수유해 가며 컴퓨터 앞에 앉아 밤늦게까지 일하는 날도 많았다.


그러던 중 눈에 들어온 새로 짓는 아파트가 있었다. 우리는 둘 다 어려서부터 아파트에서 자라기도 했고,  정신없는 일상에 집을 케어해야 하는 일까지 보태기가 버거워 아파트를 선호한다. 집값을 보아하니 우리가 모아놓은 돈이 down payment로는 부족한데, 다달이 낼 Mortgage는 가능해 보였다.


드디어 받아놓은 은행원과의 미팅날.

우리가 원하는 집을 분양하는 부동산에서 연락을 해 놓았다고, 그 집 예쁘지? 하면서 웃으면서 시작된 미팅.

꽤 오랜 시간 컴퓨터를 두들기더니 컴퓨터 화면을 우리 쪽으로 돌려 보여주며 하는 말,

"Tragbarkeit(이게 우리나라 말로 뭔지 모르겠는데, 소득대비 집값을 분석하는 지표로 쉽게 말해 이 집을 짊어지고 갈 경제력 능력이 되는지를 보는 것)은 좋아 보이는데 20%가 현금이 아직 안 모였네? 더 끌어올 돈 없어? "

"우리 다달이 얼마씩 넣으면 1년 안에 모일텐데 계약할 때 그 사항까지 같이 계약해서 진행하면 안 될까?"

"아니, 안돼. 최소 20%가 있어야 시작할 수 있어."

"으.. 응.(오우노)"


나중에 들어보니 은행에 따라 은행 직원에 따라 경험이 좀 있고 융통성을 부릴 힘이 있는 경우에 그렇게도 해준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우리 담당 은행원은 좀 젊어 보이는 데다 우리가 둘 다 외국인이라 원칙대로 하는 게 보였다. 그래, 원칙은 원칙이니까. 깨갱


그렇게 빠꾸(언어 죄송)를 당하고 일 년 후 다른 맘에 드는 아파트가 보여 다시 간 은행. 아이러니하게도 일 년 사이에 모인 돈이 많아진 만큼 우리가 원하는 아파트의 가격도 높아져 있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는 부동산 가격은 한국이나 스위스나 마찬가지다.


이번에는 다른 직원이었는데, 또다시 계산기를 두들겨 보더니,

"너희 시작하려면 down payment 더 가져와야 해. 좀 모자라."


아오! 또 down payment가 문제인 것이냐!

이번에도 포기하기엔 라헬의 유치원 배정이 마음에 걸렸다. 얼른 이사를 해야 라헬이 유치원 배정을 받아 유치원을 중간에 옮기지 않고 한 군데에 쭉 다닐 수 있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나의 마음 한 구석에는 우리 부모님한테 좀 빌릴까?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토마쓰는 생각이 달랐다.

여기서 잠깐. 전의 글에서 우리 아부지가 결혼 전에 토마쓰에게 한 질문을 기억하시는가?

기억 안나시는 분들을 위해:

https://brunch.co.kr/@swissajumi/23 


우리 남편 입장에서는 자기 힘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 자존심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학 입학하자마자 신문사에서 음악 평론가로 활동하며 경제활동을 시작한 남편은 스위스로 유학 와서는 장학금으로 생활비까지 받아 부모님에게 손 벌리는 것이 익숙지가 않은 사람이다. 무서운 장인어른에게는 더더욱!


몇날며칠 고민하다 이번에 또 기회를 놓치면 라헬 유치원을 다니던 중간에 옮겨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 게 뻔했다. 어떤 이에게는 그게 뭐?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하나의 허들이었다. 결국 엄마에게 전화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그래서, 돈 좀 빌려줘. 안정되는 대로 갚을게."


부모님은 라헬의 유치원이 걸린 문제라 흔쾌히 빌려주셨고, 우리는 그렇게 다시 은행을 향했는데,


"오케이. down payment 통과. 그럼 이자를 떠안고 갈 능력이 되는지 계산해 보자."

당시는 금리가 낮았던 2017년. 금리가 낮으니 가능한 거 아냐? 생각했건만,


노노노, 우리가 그리 호락호락할리 없잖아?

대출받는 돈의 일부는 고정금리로 금리가 유지되고, 또 일부는 변동금리로 대출 금리에 변동분이 반영되는데, 이 변동금리가 최대 6배까지 올랐을 경우의 그 모기지액이 우리의 월수입의 33%를 넘으면 안 된단다.

조마조마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을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던 은행원이 엄지를 올리며

"되겠다. 그린 라이트! " 한다.


앗싸! 숙제 끝냈다!

속이 시원했다. 아, 그랬구나. 나에게 집을 사는 문제는 미처 끝내지 못한 숙제처럼 맘속에 찜찜하게 자리하고 있었구나.


그렇게 계약을 마치고, 우리의 첫 집이 다 지어져서 이사 들어갈 때까지 또다시 열심히 일하고 일하여 부모님에게 빌렸던 돈도 다 갚았다. 나중에 사루비아님이 하신 말씀,

"안 갚아도 된다 생각하고 줬는데 기어이 다 갚더라."

(어머니, 그런 말씀은 진작진작 큰소리로 해주셨어야죠)


어쨌든 우리는 지켰다, 토마쓰의 마지막 자존심!


우리의 땀방울로 마련한 첫 집에서 오늘도 열심히 살고 아이들을 재우고 자기 전에 글을 쓰며, 누군가에겐 이 글이 열심히 사는 원동력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보통사람이 빡세게 일해서 집을 마련하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보통사람 스위스 아주미가 할 수 있으면 여러분도 할 수 있다! 그럼, 난 내일 또 바쁠 예정이니 자러 가야 해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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