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Mortgage 시스템의 이해
지난 주말은 Fronleichnam, 그리스도 성체 주일 연휴로 우리에게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긴 주말이 주어졌다. 금요일에 이제는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아실 Christina와 함께 워킹을 하다,
(이 아이가 누군지 궁금하신 분 https://brunch.co.kr/@swissajumi/2)
너희 그 주말에 뭐 해? 물으니 Ticino(스위스 내 이태리어권)로 짧은 휴가를 간단다.
너희도 올래? 묻는걸, 얼마 전에 한국도 다녀왔고 집에서 쉬고 싶어서 다음을 기약하며 동네 한 바퀴 돌고 집에 왔는데, 점심 먹으러 온 라헬이 또 묻는다.
"엄마, 우리 Langes Wochenende(long weekend)에 어디가?"
"응? 별 계획 없는데? 엄마 한국도 다녀왔고, 집 정리하고 쉬려고 이번엔. "
"뭐야! 친구들 다 어디 간대. Jonah는 London 가고, Laura는 Lugano 가고, Jette는 Paris 가고. 우리만 맨날 어디 안 가!!!!“ (사실 아님)
"라헬, 아빠랑 얼마 전에 폴란드도 다녀오고 엄마는 한국 다녀오고.. 휴가 때마다 어디를 갈 수는 없어. 어쩔 때는 가고 어쩔 때는 집에 있을 수도 있는 거야. 그 대신 그 주말에 뭐 재미있는 거 하자."
"Ich glaube dir nicht.(엄마 말 못 믿겠어.) 아빠한테 말해 볼 거야."
"촴놔, 아빠한테 말해도 같은 대답일걸?"
아빠는 다른 대답이었다 한다.
라헬이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아빠한테 억울함을 토로하자(아오! 동네사람들, 얘가 글쎄 안 다니는 애가 아니라고요) 맘이 약해진 토마쓰는 애 다 들리게 나한테 와서,
"우리도 하루 이틀 Lugano라도 다녀오자. 바람 쐬고 맛있는 파스타도 먹고."
"갑자기? 계획에 없던 일이잖아."
"계획에 없이 갑자기 그렇게 떠난 지도 좀 됐네. 재밌잖아."
".. 그럴까?.."
(라헬 귀 쫑긋)
그때까지 아무 생각 없던 나도 마음이 살랑거렸다. (파스타 때문에 흔들린 거 아님, 절대 아님)
"그러면, Laura네(Christina의 딸로 우리 라헬과 친한 학교친구임) Lugano 간댔는데, 가서 서프라이즈해줄까?"
"응!!!! 그러자!!!!!!!! 아아아아아악!!!!!!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라헬은 팔짝팔짝 뛰며 신났고, 아놔 Lugano 안 갔다가는 뿔난 라헬을 감당해야 할 주말이 Long weekend가 아니라 eternity weekend로 느껴질 것이 뻔하니, 이렇게 된 이상 기분 좋게 가쟈! 렛츠고!
Lugano는 이태리 국경에 가까운, 스위스에서도 이태리어를 쓰는 Ticino지역에 있는 도시. 우리 집에서는 160km쯤 떨어진 곳으로 유럽의 남북을 잇는 통로인 고타드 터널은 들어갈 때는 비 오는 독일어권이었는데, 나와보니 해가 쨍한 이태리어권이다. 2시간 운전해 갔을 뿐인데 여권 없이 해외여행하는 기분 물씬 난다!
결론적으로 크리스티나에게 귀띔을 해 둔 덕에 라헬의 친구 서프라이즈 대작전은 성공적이었으며 Lugano 시내 한복판에서 만난 라헬과 Laura는 그 전날 학교에서 하루종일 붙어 다닌 것 무색하게 얼싸안고 소리 지르고 좋아했다는(최소 이산가족 상봉). 그리하여 우리는 스페인인 크리스티나와 그의 네덜란드인 남편 헨드릭, 다른 산책 멤버 중의 한 명인 스웨덴인 크리스틴과 그의 스웨덴/대만인 남편, 나의 폴란드인 남편과 한국인 1인(저요) 이렇게 정말 인터내셔날한 그룹으로 예약해 둔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가장 반전인 이야기는 이 거대한 인터내셔날한 그룹이 나 빼고 다 스위스인(스위스 국적인)이라는 거다.
이게 내가 우리 동네로 이사 온 이유이기도 하다. 이들처럼 스위스에서 자리도 잘 잡고, 하는 일에 있어서도 성공적이고 여유로운 외국인들이 있는 곳이 같은 외국인인 나에게는 편하고 좋았다. 전에 살던 동네도 좋았지만 스위스인들의 비율이 훨씬 높은 대대손손 사돈의 팔촌까지 엮여 있는 사이들이 많았던 동네로, 한국인 입장에서는 어딘가 모르게 답답한 면이 있었던 반면, 지금 사는 곳은 아이들의 학급 학생 이름들만 봐도 엄마나 아빠 중 하나는 외국 출신인 집들이 대부분이다.
문득 유럽에 와서 살았던 곳들이 스쳐 지나간다.
20여 년 전 독일로 처음 유학 와서 냈던 집세가 아직도 생각나는데 보증금 540유로에 월세 180유로였다.
스위스 물가에 적응한 지금 그 당시 낮은 월세에 새삼 다시 한번 놀랐는데, 내가 유학을 하며 산 집은 셰어 홈으로 독일 내에서도 저 집세는 꽤 저렴한 편이었다.
스위스로 넘어와서 제일 놀랐던 게 대학생들의 사는 수준.
셰어 홈이라 해도 집들이 상태가 매우 좋았고, 루체른이라는 도시의 특성상 운이 좋으면 알프스 뷰를 보며 사는 럭셔리한 학생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물론,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치러야 했지만, 음대생에게 들어오는 연주를 조금만 해도 그 집세 정도는 쉽게 커버가 되었기에 내 느낌에 스위스는 학생들도 꽤 높은 수준의 삶을 사는구나 싶었다.
첫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니 자연스레 관심이 집으로 옮겨갔다.
우리는 언덕 위의 뷰가 좋은 꿈의 집에 살고 있었지만, 우리 소유의 집은 아니었다.
여기서 평생 살 수만 있다면 렌트비 기꺼이 내고 살 수 도 있겠다 싶은 순간도 많았는데, 그러기엔 다달이 내는 렌트가 꽤 되었고, 한국 부모님의 그래도 집은 사야지 하는 걱정 어린 시선이 뭔가 우리가 아직 불안정한 상태라고 얘기하는 것 같아 심리적 압박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 얘기를 하려면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결혼 허락을 받을 때 이야기이다.
남자 사람 친구 신분으로 한국에 방 잡아 놀러 왔던 토마쓰가 사실은 나의 남자친구이며, 우리 집으로 와서 엄마, 아빠에게 인사를 하고 무릎 꿇고 결혼 허락을 구하던 그날, 우리 아부지는 올 것이 왔구나. 띠로리~
뒷목 잡으시며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셨다(사루비아님은 이미 부엌으로 도망도 모자라, 비어있는 음식쓰레기 통을 들고 괜스레 밖을 서성거렸다 한다).
며칠 후 다시 불려 온 토마쓰에게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한때 네이버 인물사전에 대한민국의 금융인으로 등록되어 있던 우리 아부지는,
“너 돈은 얼마나 있니? “라고 물어보셨다. ㅎㅎㅎㅎㅎ
지금 생각해도 등에 땀이 난다. (내가 왜?)
당시만 해도 쓸 줄은 알아도 돈 모을 줄 몰랐던 전 공산국가 폴란드 출신의 토마쓰는 어버버.. (이게 무슨?!)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았고,
“너희가 그렇게 서로가 좋으면 내 딸과 1년간 동거를 허락하겠다. 그 대신, 1년 동안 너희 일해서 번 돈 쓸 것만큼 다 쓰고, 남은 돈은 한국으로 보내라. 얼마가 모이는지 봐서 결정하겠다. 이만 물러가라!” (이만 물러가라는 우리 아빠의 역할에 너무 몰입해서 내가 뿌린 스위스산 MSG)
그렇게 우리는 IMF가 국가의 금융정책에 간섭을 하듯이, 간섭만 안 당했지 뭔가 대외적으로 큰돈 쓰기에 찜찜한 상황이 되어 (그럴 돈 있으면 한국 보내 이것들아! 지켜보고 있다)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했듯이 내 돈이 내 돈 아닌 내 돈인 듯 남돈 같은 나날들을 보냈다.
여기서 앞으로 4배속, 우리의 재정상태를 보고하며 일 년을 같이 살면서 결혼 허락을 받고, 따따따단~ 결혼을 하고 다시 집 얘기로 가서, 집을 사려면 일단 여기저기 어떤 집이 있나 봐야겠다 싶어 1년간 주말이면 이집저집 참 많이도 다니며 보았다.
그 당시 우리의 재정 상태의 현시점을 파악하러 간 은행 미팅에서 은행 담당자는 일단 집값의 최소 20%를 현금으로 가져오라고 했다. 그런 다음에 대출 이자가 어떻게 될는지 계산해 보자, 이 호갱님들아 (마지막 멘트는 내 귀에만 들린 환청임).
20%만 가져가면 된다고? 개꿀인데?
당시 모기지 시스템을 처음 접했던 나는 이러면 집 사기 쉽겠다고 껌이네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몰랐지. 자본주의 것들, 특히 스위스 은행 놈들(언어 죄송)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