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위스 아주미 Jul 02. 2024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엄마를 설득해 봐.

모두가 No라고 할 때 Yes 하는 법

애들이 잠든 후 자유시간에 나는 한국 예능 프로 보는 걸 즐긴다. 내 나라를 떠나 외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공감할 테지만 내 나라말로 알아들으려 애쓰지도, 고도로 집중하지 않아도 귀에 술술 들어오는 시답잖은 우스갯소리를 듣는다는 건 그 어떤 힐링의식과도 같은 것으로 그게 금요일밤 나 혼자 산다를 보는 나의 핑계이다(혼자 살고 싶은 거 아님, 독립을 꿈꾸는 거 아님). 안 그래 보여도 나는 분명 테라피중이다!


최근 효리언니가 엄마랑 여행 가는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아, 효리언니! 언니는 여전히 솔직하기를 겁내지 않는 멋진 사람이군요! 연예인 걱정, 대중매체에서 만들어 낸 연예인 이미지를 진짜인양, 어쩌고 저쩌고 참 없어 보이는 행위이지만 나의 10대부터 40대까지 몇십 년을 봐온 이효리는 그때그때 동시대를 산 사람으로 하여금 참 공감이 많이 되는 얘기를, 행동을 한다. 나의 10대에는 언니가 입은 카고 바지에 청순해 보이려고 머리를 한 올 한 올 다리면서 이런 꾸안꾸 스타일이 원래는 훨씬 더 신경 써야 하는 거라는 말에 너무나 공감했고(꾸안꾸 추구하다 추레해진 경험 많은 1인), 20대에는 연애질 하느라 이효리에게 관심 둘 겨를이 없었지만(언니 미안), 30대에 언니의 제주도 집과 남편을 보며 아, 우리 남편이랑 좀 비슷하네 뭐, 그런 생각도 했다가, 40대가 된 지금 엄마랑 떠난 여행을 엿보며

'아, 이효리도 집에서는 평범한 막내딸이구나.', '맞아, 엄마랑 여행하면 저렇지.'

끊임없이 자신을 알아가고 삶을 반추하는 이효리를 보면서 나랑 좀 비슷한데? 저런 친구 하나 만나서 소주 한잔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탑스타의 자리에서 세월이 흘러 차근차근 내려오려 노력하는 이효리에게 당신은 매 순간 멋지게 잘 살고 있다고, 응원한다고 허공에 대고 외쳐본다! 언니, 평범녀인 나도 전성기 때 같지 않은 외모와 애들 넘어졌을 때나 하게 되는 심쿵.. 받아들이기 쉽지 않아요!


지금 이순간 내 눈 앞의 이웃이 주고 간 수국다발과 요즘 어딜가나 나를 따라다니는 노트북


이효리와 그녀의 엄마의 소통 (혹은 소통의 부재ㅎㅎ) 마저도  7~80년대에 태어난 이들은 공감할 것이다.  

'맞아, 엄마들은 감정을 직면하는 것에 서툴지.'

우리의 엄마들은 감정을 직면하는 법을 못 배우고 자랐고, 우리 세대는 감정은 직면하는데 그걸 표현하는 법을 못 배우고 자랐다. 특히 그것이 부정적인 감정일 때는 더더욱.


나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생각하면 학생의 신분에서 감정을 들여다보는 행위는 사치였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올바르고 모범적으로 눈앞에 보이는 미션을 수행하는 게 우선이었고, 행여라도 무언가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시점에서 나의 이야기를 자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말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학교에서 선생님의 주장에 반대되는 의견이라도 표출했다간 어쭈,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어디서(우리 때만 해도 이 무조건적 유교성 갑질이 통할 때였다) 단골멘트: 눈 깔아. 불만 있는 사람 교무실 와서 얘기해. (선생님, 당신의 아군들이 밀집하고 있는 교무실에서 맞짱이라뇨, 그냥 이쯤에서 아닥모드로 전환하겠습니다)


자, 너의 의견을 한번 이야기해 보겠니? 하는 상냥한 어른은 티비속 광고, 오늘은 내가 짜~파게티 요리사 짜라짜짜! 쯤에나 나오는 유니콘만큼이나 허구 속 인물이었던 걸로. 그땐 그랬~지.  




세월이 흘러 교사가 된 지금, 학생들을 보며 그때의 나처럼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할많하않

선생님의 부당함을 알지만 넘어가주는 그런 상황만은 만들지 않으려 노력하는데 얼마 전 이런 일이 있었다.


나의 학생 중에 Myriam이라는 아이가 있는데, 지금은 18세 성인이 되어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하기 전 1년을 쉬며 프랑스어 공부를 위해 프랑스에서 1년을 지내며 일과 어학을 하는 중이다. 스위스 아이들 대부분이 대학 진학 전 어학연수를 1년쯤 하는데, 이에 대해 할 얘기가 많은데 얘기가 또 산으로 가는 걸 막고자 이건 다음 기회에!


다시 얘기로 돌아와서, 이 아이는 어릴 때는 월반을 하고 고등학교에서는 공부를 진짜로 잘해야 들어갈 수 있는 독일어/영어 Bilingual 반에서 공부한 똑똑한 아이이다. 어렸을 때부터 봐온 이 아이는, 하나를 가르치면 그 안에서 자기가 해석하고 추론하여 둘을 알아내는 내 기억에 남는 특출 난 아이 중 하나이다.  

특출 난 만큼, 교사가 이야기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항상 왜 그렇지? 의문을 가지고 본인이 이해하고 납득이 되어야 넘어가는데, 본인의 질문에 내가 답을 못주는 상황이라도 생기면 그다음 레슨 때 날 보자마자, 그때 그거 알아봤어? 하고 꼭 물어보는, 궁금한 건 꼭 알고 넘어가야 하는 게으른 선생님(저요) 책 한 번이라도 더 열어보게 긴장시키는, 기특하지만 어쩔 땐 귀찮기도(이건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이는 발설 하면 안 되는 선생사람의 속마음) 한 녀석이다.


학기말에 음악을 전공하는 아이들의 실기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스위스의 실기시험은 나의 학창 시절의 실기시험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화기애애한 속에서 치러지는데 역시나 스위스답게 실기시험이 끝나면 학생이 심사위원 앞으로 와서 자기 변론(?)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 나의 오늘 컨디션이 어땠으며, 평소에 비해 어떤 연주를 했고 이건 잘한 것 같고 저건 좀 아쉬웠다. 뭐 이런 얘기를 하는데, 그러고 나면 심사위원장쯤 되는 교사가 엷은 모나리자 미소를 띤 얼굴로 연주 잘 들었어. 의견도 말해 주어 고마워.라고 한 후 연주 피드백을 해준다. 격세지감이로소이다! 라떼는 밖에서 벌벌 떨면서 손 풀다가 벌벌 떨면서 들어가 연주하고 입꾹닫 벌벌 떨면서 나와서 집에 가 벌벌 떨면서 선생님한테 전화했던 기억이. ㅎㅎㅎ


신기한 건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내 생각인데, 이 연주 끝나고의 대화가 점수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내가 봤을 때 연주점수는 동등한데 말빨(언어 죄송)이 센 애들한테는 심사위원들의 마음이 기울어 점수가 후해진다. 역시 결국은 기세인가? ㅎㅎ


미리암의 고등학교 마지막 실기시험 날, 아침댓바람부터 문자가 와 있었다.

그 전날 레슨 때 내가 말한 곡의 템포가 자기는 버거우니 더 느리게 연주하겠다는 통보였다.

4달 가까이 연습해 온 곡이라 하루아침에 템포를 당긴 것도 아닌, 그렇게 늘 해왔는데

아놔, 얘가 또 왜 이러지? 짜증이 났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그 곡은 느리게 연주하면 안 되는 템포이기도 하거니와 느리게 연주했을 때 그 곡의 매력이 반감되는 아무튼 선생 입장에서는 말도 안 돼, No, Nein!이었다.


미리암이라는 아이에 대해 덧붙일 사실은,

하나님이 이 특출 난 아이를 빚으실 때 똑똑함 1스푼 추가하시는 대신 덤벙거림도 2스푼 가미하셨는지 까먹고 악보 안 가져와서 다시 프린트하기, 바뀐 레슨 시간 놓쳐서 허탕 치기, 악기를 안 가져와서(!) 레슨 시간 통째로 날려먹기 등등 얘가 어디 하나 나사가 빠졌나 살펴보게 되는 일이 많았는데, 그런 만큼 자기 입장에서는 구구절절 할 말도 많고 핑계도 많은 그런 아이이다.


실기시험 날 연주홀 앞에서 만난 아이는 이미 얼굴에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고,

얘기할 시간이 1분가량밖에 없어 마음이 급했던 나는,


"네가 말한 그 템포는 여러모로 말이 안 돼. 지금 시간 없어. 우리가 해 왔던 그 템포로 해. 알았지?"

라고 했고,


아이가 불만 한가득, 반박 한가득 총알 장전하고 다다다다 발사하려는 순간.


"Keine Diskussion! (No discussion)"

쌀쌀맞게 말하고 시험장 안으로 쌩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아이는 연주하면서 손꼬이고, 멈추고, 아주 할 수 있는 실수는 다 해가며 연주를 망쳤고, 그날은 이미 이렇게 된 일, 아이를 위로하며 다음 레슨 때 얘기하자 보내고, 앞으로 4배속 다가온 레슨날.


"자, 한번 얘기해 보자. 어떻게 된 일인 걸까?"

"시험 전 레슨에서 반주랑 맞추는데 너무 템포가 빠르다고 내가 얘기했잖아."

"네가 템포가 빠르다고 느낀 이유를 모르겠네? 그 템포는 우리가 4개월가량 연습해 왔던 그 템포야. 네가 더 빠르게 한다는 걸 내가 손꼬일 수도 있으니 조금 늦추기도 한. "

"몰라, 그런데 그날 너무 빠르다고 느꼈어."


아이는 벌써 울먹거릴 조짐이 보인다.


"한번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그렇게 생각이 굳어질 수도 있어. 그렇지만 선생님이 우리가 해 오던 템포니까, 네가 할 만 한걸 아니까 그렇게 하라고 할 때는 내 말을 믿어줬으면 좋겠어. "

"나는 처음부터 천천히 하고 싶었어. 당신이 들어주지 않았잖아."


응? 이건 또 무슨 소리?


"그게 무슨 말이야? 설명해 봐."

나도 감정이 격양되었다.


아이는 울음이 나오는 걸 꾹꾹 참으면서 숨을 골라 가며 천천히 얘기한다.

"나는 처음부터 천천히 하고 싶었는데 당신이 안된다고 했고, 내 의견을 들어주지 않고 무조건 그렇게 하라고 했어. 나는 할 말이 있는데 당신이 들어줄 것 같지 않았어. "


흠, 생각이 많아졌다. 그런데 그 와중에,

요것 봐라?

키는 나보다 훨씬 크지만, 그래도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선생한테 (이쯤에서 주책없이 생각나는 대사 넌 학생이고, 나는 선생이야 ㅎㅎ 패스) 자기 할 말 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특히나 하라면 해! 말이 많아 얼굴을 하고 있는 권위적인 쌤 앞에서), 울음을 꾹 참고 자기 생각을 조목조목 조용히 얘기하는 이 아이가 한편으론 기특했다.


"너의 입장 이해했어. 그런데 그 곡은 작곡가가 명시한 템포가 Presto(아주 빠르게)야. 작곡가가 빠르게 연주되길 바라고 작곡한 곡이어서 느리게 연주하면 작곡의도에 반하는 것으로, 그렇게 되면 심사위원들이 네가 곡 해석을 잘못했다고 생각했을 거야. 시험 날 너의 얘기를 안 들어준 건 미안해. 하지만 그때는 구구절절 너의 이야기를 들어줄 시간과 장소가 아니었다고 생각해."


아이는 어느 정도 납득이 된 것 같았고, 나중에 그녀의 부모에게 들은 이야기로 그전부터 실기시험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그게 점점 극대화되어 실기시험 전날 자기 나름대로 생각한 빠져나갈 구멍(?)이

아, 이걸 느리게 연주하면 되겠구나. 였던 것 같다. 똑똑한 아이도 결국 청소년은 아기다. 응애!  


지금 그 아이는 고등학교를 탑으로 졸업하고, 의대와 음대를 복수 전공하기 전 프랑스에서 1년 프랑스어 기능을 활성화시키고(이 아이의 아버지는 프랑스 사람으로 집에서는 프랑스어로 대화한다), 프랑스 항공사에서 1년 스튜어디스로 일하며 용돈을 벌고 경험을 쌓는 중이다. 참 부러운 삶이다! 유남생?!


선생도 제자를 보며 배우는 순간이 많은데, 이 아이를 보며 배웠다.

극한 상황에서도 상대방과 다른 내 의견을 감. 정. 적. 이. 지. 않.게. 피력하는 법을. 


다가오는 여름 방학, 아이들과 집에 있을 시간이 많아지는데 아이스크림을 사달라는, 방 청소를 엄마가 도와달라는 라헬과 아멜리에게(아직은 요구사항이 귀엽다 ㅎㅎ) 말해봐야겠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자, 엄마를 설득해 봐."



이전 13화 공산국가에서 자란 폴란드인 남편 설득해 집 산 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