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에서 봤던 딱 그런 파티말야
주차를 하고 핸드백에서 립글로스를 꺼내 한 번 더 톡톡 바르고 백미러에 마지막으로 외모 첵!
굽 높은 샌들을 신은지라 조심조심 차에서 내려, 운전하는 동안 말려 올라간 치맛단을 펴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며 맑은 공기를 들이마신다.
아, 좋다!
오늘의 파티 장소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루체른 호숫가에 위치한 곳으로 저 멀리에는 알프스 설산이 보이고 파아란 하늘에 초록 잔디, 반짝이는 윤슬의 3단 콤보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눈에 담는 것만으로 행복지수가 올라가는 곳이다.
나는 지금 친구의 파티에 참석하러 왔다. 또각또각 평소에는 잘 신지 않는 힐 소리를 내며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자니 이 순간 나는 마치 캐리 브래드쇼(모르는 이들을 위하여: 미국의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볼수록 매력 있는 볼매 주인공), 비록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애들 먹을 미역국 사골 국물을 한 땀 한 땀 우려내던 아줌마지만 지금은 향수 안개를 몰고 달랑거리는 귀걸이로 멋을 낸 파티하러 온 여자다.
약속 장소 쪽으로 걸어가니 이미 많은 이들이 모여있는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와 잔잔한 피아노 재즈 음악 소리가 버무려져 들려온다. 파티장으로 들어서자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우리가 아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딱 그런 화려한 파티의 모습이다. 곳곳에 핑크색 꽃이 놓여 있고 핑크색과 하얀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들이 샴페인잔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의 파티는 셋째 딸 출산 예정일을 두 달가량 앞둔 나의 친구의 베이비 샤워로, 드레스 코드는 핑크 앤 화이트. 초대장에 아이의 성별을 암시하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몇몇 이들에 둘러싸여 있는 오늘의 호스트이자 나의 친구, 우아한 그녀를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다가갔다. 임신 7개월의 막둥이를 임신한 그녀이지만, 실크 소재의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한결같이 늘 아름답다.
유럽인들이 식사 자리나 파티에서 하는 인사인 비쥬(Bisous, 상대방과 짧게 양쪽 볼을 번갈아 대는데 한쪽 볼이 닿을 때마다 입술만으로 '쪽' 소리를 내는 프랑스식 인사)를 하고는 서로의 의상을 칭찬하며,
"너 오늘 정말 예쁘다! 호호호호호"
하고는 도착하는 다른 이들을 반기느라 바쁠 친구를 보내준다.
그런 내 앞으로 샴페인잔들이 담긴 은쟁반을 든 사나이가 나타나,
"우쥬 라이크 썸 샴페인?"
"암요. "
샴페인 한잔을 받아 들었다.
당신이 그동안 미드에서 본 그 모습 속에 지금 내가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서 있다. 나는 놀 준비가 되었다.
아이엠 뤠디!
여기서 질문, 스위스 아주미는 내향형일까 외향형일까?
일단, 내 안에는 3개의 자아가 있다.
언어는 세계관이라 했던가? 외국에서 살거나 외국어를 하는 사람들은 알 테지만,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 나의 성격도 많이 달라진다.
한국어를 쓸 때는 처음 보는 사람과 우스개 소리를 하며 개그 본능에 충실하긴 해도 낯을 꽤 오랫동안 가리는 편이고, 독일어를 쓸 때는 농담보다는 사무적이거나 진중한 성격이 되는 것 같고, 영어를 쓸 때는 아무한테나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는 세상 활달한 성격이 된다.
가끔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각각 다른 세계관의 사람들이 섞여서 모이면 내 안의 자아들 간의 충돌이 생기면서 어버버 버퍼링이 느려져 사람이 고장이 나기도 한다. 이걸 학계에서는 세계관의 붕괴라고 부른다(그런 학계 없음).
그렇지만 사람 안 변한다고, 내재되어 있는 진정한 나의 성향은 파티 가려고 옷 다 차려입고 화장하고 뭐 하고 다하고선 딱 신발 신는 순간,
'아, 가기 싫으다.'
자꾸만 눌러앉고 싶은 욕구를 꾹꾹 다시 저 깊숙한 곳 안쪽으로 쑤셔 넣기 일쑤인 대문자 I 내향형 인간이다.
내향형이면서 사람은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것 치고는 또 엄청 사람을 가리는 모순적인 아줌마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만남은 한 3~4명 모여 앉아 저녁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런저런 얘기, 울다가 웃다가 하는 만남이다.
그런 나이기에 20년 전 유럽에 왔을 때 이 유럽식의 스탠딩 네트워킹 파티가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
아까 얘기한 그 비쥬도 오마이, 얘가 왜 이렇게 가까이 다가와. 얼음이 되기도 했었고, 프랑스와 독일은 2번, 스위스는 3번, 그것도 오른쪽 뺨 먼저 갖다 대야지 왼쪽부터 다가갔다가는 친구 남친이랑 입술뽀뽀하는 대참사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야 했고, 독일의 은사님이 만날 때마다 볼에 뽀뽀를 해대니 너무 부담스러워서 멀리서 교수님이 보이면 피해서 도망가기도 했었다.
독일 유학시절 처음 초대받아간 독일인들의 파티에서 처음 보는 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한 손에는 와인잔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넣고 삐딱하게 서서,
'나는 혼자 이렇게 왕따처럼 서 있지만, 그래도 이 파티를 즐기고 있다. ' (아, 집에 가고 싶다)
라는 분위기를 풍기고자 엷은 미소(썩소)를 지으며, 음악에 맞춰 발꼬락을 까딱거리기도 했었다.
지금의 나는 센 언니들 틈에서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보니께 목소리도 더 내고 농담 따먹기도 하다 보니 그게 자연스러워져 예전보다 훨씬 활동적이 되었다. 나 자신을 갈아 넣어 외향인 흉내를 내던 것이 하다 보니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편해져 진심으로 즐기게 된 것도 같다. 아마도 이 날도 나를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면
'쟤가 제일 재밌게 노는데?'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사실이다.
내가 기억하는 우리나라의 파티 문화는 다 같이 둘러앉아 누군가가 주도하는 대화에 다른 이들이 반응 혹은 추임새 정도만 넣었지, 굳이 모여놓고 삼삼오오 따로 이야기하고 노는 경우는 잘 보지 못했다.
나의 어린 시절 우리 부모님은 한 번씩 지인들을 초대해 집에서 저녁 식사를 대접하곤 했었다. 그때마다 나와 언니는 잡채에 넣을 숙주 다듬기, 마늘 까기, 그릇에 안주 담기 등등 엄마를 도왔고, 아저씨 아줌마들이 오셔서 식사를 하시면(그때는 부모님 친구분들은 다 아저씨, 아줌마라고 불렀다. 요즘에는 이모, 삼촌 하지만 나는 아직도 아저씨, 아줌마라는 말이 정겹고 좋다) 아빠 곁에 가 앉아서 안주 집어 먹으며 말씀 나누는 걸 듣기도 했었다.
한쪽 켠에 앉아있는 아줌마들끼리 대화에 발동이 걸려 볼륨이 높아지기라도 할라치면, 누군가가(보통은 우리 아부지)
" 아, 거기 지방방송 좀 끄소!"
뭐 이런 우스갯소리로 주의를 집중시킨 기억이 있다.
성인이 되고 맛본 어른들의 모임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쓴이는 대학교 1학년 일 년을 미팅하다 다 흘려보냈는데(후회는 없다), 4대 4 미팅을 일 년 내내 주말마다 하다 보면 전에 미팅했던 이를 또다시 미팅에서 만나는 경우도 있었고, 나도 미팅 중인데 옆 테이블의 미팅하는 이들 중에 불편한 이가 있는 웃픈 경우가 생기기도 했었다.
지금은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은 그때에도 남녀 8명 중에 사회자 역할을 하는 이가 꼭 있었고, 그의 진두지휘하에 다른 이들이 이끌려 갔더랬다. 다시 말하면, 내가 굳이 활발하게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같이 묻어서 갈 수 있었다는 얘기다.
유럽인들의 파티에서는 누군가가 나를 챙겨 줄 거라는 기대를 하면 안 된다. 내가 나 자신을 그들에게 들이밀어야 한다.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세계가 따로 없다. 호스트는 이곳에 온 모든 이들과 친하기 때문에 어색한 이 느낌이 싫다고 그에게 너무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있는 것은 실례다. 다른 이들과 잘 어울리고 재밌게 놀아주는 게 호스트를 도와주는 것.
그렇게 오늘 나는 다시 이 정글에 던져졌다.
다행히 오늘은 그동안의 이런저런 파티들에서 만나 친해진 이들 몇몇이 있다. 그녀들에게로 다가가 또 비쥬로 인사를 하고 샴페인을 홀짝거리며 그간의 근황토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유럽인들은 미국인들에 비해 처음 보는 이에게 훅 다가가지 않는다. 예전에 잠깐 몸 담았던 오케스트라의 첫 출근날, 리허설 중 쉬는 시간에 쭈뼛거리며 서 있는 나에게 제일 먼저 다가와 줬던 비올리스트 미국인이 말했었다.
미국은 어떤 조직에 신입이 나타나면 모두가 그에게로 가서 환영하며 인사하는 반면, 유럽은 신입이 일일이 한 사람씩 가서 인사를 해야 한다고. 유럽인들의 도도함이란.
그래도 오늘 같은 파티에서는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기본값이 있기 때문에, 처음 만나는 이와도 꽤 금방 친해지고 대부분이 열린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편이다.
이때부터는 랜덤으로 만난 누군가와의 스몰토크가 시작된다. 자기소개를 시작으로 이제부터 머리에 쥐 나게 너와 나의 연결 고리를 찾는 게임이 시작된다. 보통은 이 샴페인이 참 맛있네, 저 꽃이 정말 예쁘네로 시작해서
"그래서, 너는 호스트랑 어떻게 아는 사이야?"
"아이들이 같은 반이야."
"외국인 학교 다니는구나. 그럼 집에서는 어떤 언어로 대화해?"
"아이랑은 독일어로 하고, 우리 부부는 영어를 써."
" 우리돈데. 우리는 한국어, 폴란드 다 뒤죽박죽이긴 해."
"아, 한국에서 왔어? 우리 얼마 전에 서울 다녀왔는데!"
" 어머, 정말? 가족 여행한 거야? 어디 어디 가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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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과 대답을 하며 서로를 알아가고, 공통 주제를 찾아 대화를 이어나간다.
이게 기본적으로 인류에 대한 관심을 품고 대화가 끊기지 않도록 대답과 질문을 적절히 섞어줘야지, 묻는 말에만 대답한다던가 상대방의 말을 듣고 하는 응, 그래. 식의 대답은 싸한 분위기 메이커로 소문나는 지름길.
이 스몰 토크라는 게 힘든 이유가 몇 가지 함정들이 숨어 있기 때문인데,
-처음부터 너무 개인적인 질문 금지
-호구 조사 나온 공무원마냥 시시콜콜 알아내려는 거 금지
-너무 한 사람하고 길게 대화하는 것도 금지
-일을 위한 네트워킹 파티에서 너무 노골적으로 사리사욕 채우기 금지
-돈 얘기 금지
-자기 자랑 금지
-너무 자기 얘기만 하는 것 금지
-자기 얘기를 너무 안 하는 것도 금지
오른손 올리고 왼손 내려. 왼손 올리지 말고 오른손 내리지 마. 오른발 들고 왼발 내려.
아놔. 어쩌라고!
이 표면적이고 식상한 대화를 재밌어 죽겠다는 듯 유려하게 이끌어 가는 게 파티에서 인기녀로 거듭나고, 그게 일적인 만남인 경우 사람들과 유대감을 쌓아 일로 이어지고, 그 파티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 주최하는 다른 파티에 또 초대받는 일일 터인데..
가만 있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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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그냥 파티 안 갈래요. 괜찮아요. ㅎㅎ
아오 기 빨려.
외향인인척 하다 당떨어져 오늘부터 5박 6일 좀 누워 있어야겠습니다.
유럽 파티 문화의 꽃은 몸져눕기였다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