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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탐색자 Apr 09. 2019

언제부터였을까, 이태원이 핫플레이스로 변한건 I

이태원 골목길의 아우성 6

이태원이라는 서울의 가장 이국적인 공간을 처음 경험한 건 1991년이었다. 대학교를 막 입학한 신입생이었던 나는 짝퉁 가방을 사러 이태원에 간다는 같은 과 동기를 따라 오후 수업도 빼먹고 따라나섰다. 외국 영화에 나올 것 같은 이국적인 거리를 상상하고 있었던 나는 이태원의 지저분한 거리에 몹시 실망하였다. 매끈매끈한 건축물들이 줄지어 들어선 단정하고 반듯반듯한 강남의 쇼핑거리에 익숙한 X세대였던 나에게 이태원의 거리는 뭔가 정돈되지 않은, 산만하고 어지러운 모습으로 보였다. 길거리에는 멋진 외국인들 대신 루이뷔통, 구찌, 샤넬, 프라다를 외치는 '삐끼'들로 가득했다. 친구는 좋은 물건이 있다며 팔을 붙잡는 삐끼들을 물리치며 익숙한 듯 이태원의 좁은 골목길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는 짝퉁에도 급이 있다며,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끌고 골목길 안쪽의 어느 작은 가게로 들어갔다. 그 가게에는 친구의 말처럼 ‘A급'의 짝퉁 가방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주인아저씨는 가방을 열어 구석구석 세세히 보여주며, 보증서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 후에도 나는 그 친구를 따라 재미 삼아 짝퉁 가방과 신발을 구경하러 이태원을 들락거렸다.


1990년대의 이태원은 그렇게 나에게 재미 삼아 쇼핑을 하러 가는 곳이었고, 다른 패스트푸드 점보다 고기가 훨씬 두껍고 맛있다는 이태원의 초입에 위치한 버거킹의 치즈버거를 먹으러 가는 곳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태원의 상권은 급격하게 위축되고 있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외제상품 모조품에 대한 정부의 단속과 범죄와의 전쟁 등으로 인하여 1980년대 하루 평균 1만 5천 명이던 이용객 수가 2천5백 명으로 80% 감소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태원에서 유흥을 즐기던 외국인들은 강남이나 신촌, 그리고 홍대 지역의 클럽이나 바를 찾았다.


이태원의 위축된 상권을 살리고자 정부는 1997년 이태원을 관광특구로 지정하였으나, 불편한 바가지 가격 등으로 외국인 쇼핑객을 동대문 상권에 빼앗기게 되었다. 더구나 1997년 내가 치즈버거를 즐겨먹던 버거킹에서 미국인에 의해 한국인 대학생이 살해당하는 충격적인 일이 발생하였다. 그 이후 나는 2001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이태원에 가지 않았다. 나에게 이태원이란 '위험한 곳'... '보호받을 수 없는 곳'이라는 각인이 새겨졌다. 실제로 1991년부터 2000년까지 2,384건의 기사를 대상으로 분석하여 추출한 이태원 관련 키워드는 범죄, 관광특구, 외국인들과 여종업원 살인사건과 관련된 매카시 상병 등으로 나타났다.

1991년부터 2000년까지 이태원과 관련한 키워드 분석 결과


이태원은 서울의 어떤 지역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1945년 미군부대의 주둔과 함께 자생적으로 발생한 휴식과 유흥을 위한 기지촌인 이태원은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활동하고 있는 서울의 가장 이국적인 공간이다. 이태원이 속한 용산구는 2000년대 초반까지 서울시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었으며, 용산구에 속한 이태원 1,2동, 한남동, 서빙고동, 그리고 이촌1동은 거주 외국인의 수가 600명 이상인 동네다. 비록 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계 중국인의 대거 유입으로 서울에서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구는 더 이상 용산구가 아니라 영등포구와 구로구 지역으로 나타났지만, 가장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이 거주하는 지역은 여전히 용산구이다.


서울시 자치구별 등록 외국인 변화 추이 (1992년, 2005년, 2017년)

영등포구와 구로구에는 중국인이 외국인의 90%를 차지하는 반면, 용산구에는 미국인, 러시아인, 나이지리아인, 파키스탄인, 필리핀인, 일본인, 중국인, 동남아인 등으로 여러 국적의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용산구 국적별 등록 외국인 수 (2000년-2015년)

지금도 부촌으로 꼽히는 이태원 지역은 1960년대부터 외국인 전용 고급주택 및 아파트들과 각국의 대사관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 들어서면서 우리나라 정부의 보세 제품 수출정책과 섬유산업의 호황으로 이태원은 값싸고 특색 있는 보세물품을 살 수 있는 쇼핑가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이태원 일대에는 양복점, 신발가게, 보세점 등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 뒷골목에는 가내 공장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1980년대에는 외제상품 모조품과 수출 누락품 등을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면서 86 아시안 게임, 88 올림픽 게임을 치르는 동안 많은 외국인들이 이태원을 방문하면서 최대 호황기를 누리게 되었다. 이태원은 쇼핑뿐만 아니라 밤문화를 즐길 수 있는 유흥 관광지로서 유명해지게 되었는데, 외국인을 상대로 한 영업시간에 제한이 없었던 클럽이나 바에 한국인들도 점차 많이 찾기 시작하였다. 당시 미국의 문화를 동경하는 한국인들은 이태원을 찾아와 미국의 음악, 패션, 춤 등을 흡수하고 모방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기존 상권이 축소되고 주한 미군의 발길이 줄어들자 이태원의 문화도 바뀌기 시작하였다. 가장 큰 변화는 이태원에 유입되기 시작한 새로운 행위자들, 성소수자들의 등장이다. 성에 대한 보수적인 시각이 지배적인 한국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은 고정된 질서를 거부하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이태원에 자신들만의 공간을 형성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온라인 커뮤니티의 활성화로 더 많은 성소수자들이 몰려들었다. 이태원에는 일찍부터 성소수자들이 존재하였으나, 이들이 출입하는 업소가 그다지 많지 않았고 정부의 단속에 의해 오랜 기간 동안 영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89년 당시에 4-5곳에 불과하던 게이클럽이 2000년에는 약 30곳으로 급성장하였는데, 주로 이태원 소방서 골목 근처에 분포해 있다.


이태원의 성소수자 업소 분포 현황(2010년 현재), 자료: 서울역사박물관


보광동 골목길의 모습

이태원의 또 다른 새로운 행위자들은 산업연수제를 통해 국내에 유입된 이주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주로 아시아 및 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외국인들로 다양한 국적과 계층의 외국인들이 밀집되어 있으며, 다른 지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저렴한 이태원로 남쪽의 이태원 1동과 보광동 일대의 오래된 주거불량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의 이태원은 비록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갔지만, 미국 문화가 지배적이었던 서울의 이국적인 공간은 점점 더 다국적, 다민족적, 다정체성의 정서가 수용되고 교감되는 문화공간으로 변모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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