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태 할아버지

예찬주의자#2

by 매버지

딸아이는 잠에 들기 전 침대에 누워 책을 본다. 아직 글을 읽지 못하니 ‘본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하루 종일 격무에 시달리다 함께 누운 아내도 피곤해 직접 읽어주지는 못한다. 그런 엄마·아빠들을 대신해 읽어주는 ‘세이펜’이라는 기기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렇게 몇 권을 듣다 보면 아내가 먼저 잠들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나 역시 아이 침대로 파고들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내 이야기에는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 하나 있다. ‘망태 할아버지’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무의식 속에 숨어 살던 그의 존재가 아이의 탄생과 함께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아이가 더 어릴 때는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망태 할아버지가 잡으러 온다~” 하며 으름장을 놓곤 했다. 아이는 망태 할아버지가 무엇인지 정확히 몰랐던 것 같지만, 본능적으로 잡히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은 들었나 보다. 그래서 종종 망태 할아버지는 내 편이 되어 칭얼대는 아이를 잠재워주었다.


요즘 잠자리에 누워 들려주는 지어낸 옛날이야기의 주인공은 대개 아이 자신이다. 최근에 아이가 보였던 잘못된 습관이나 행동을 소재 삼아, 교훈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편식을 하면 좋아하는 음식만 먹다 키가 크지 않는 아이의 이야기가 되고, 몸이 튼튼하지 않으면 호랑이를 만나 힘을 쓰지 못하고 잡혀가는 이야기가 된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지만 아이는 마치 진짜 그 아이가 된 것처럼 온몸을 긴장한 채 이야기에 빠져든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악역은 단연 망태 할아버지다. 오늘도 아이를 재우며 그를 등장시켰다. 최근 유치원 방학 기간 동안 친한 친구가 장기결석을 하면서 유치원 생활이 재미없다며 아이가 자주 칭얼댔다. 지난주에는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말하기도 했고, 가서도 구석에서 자주 울다 선생님께서 전화가 오기도 했다. 이런 아이에게 울음에 대한 경각심을 주고 싶어, 우는 친구들을 망태 할아버지가 잡아간다고 이야기했다.


이후 아이는 자신이 했던 잘한 일, 착한 일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안 잡혀갈 명분을 내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망태 할아버지는 ‘우는 것’을 가장 싫어해서 울면 잡아간다고 강조했다. 오늘 망태 할아버지가 내게 찾아와 “OO가 유치원에서 울었느냐”라고 물었다고 했다. 'OO가 잡혀갈까 봐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는데, 또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하니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걱정 마. 망태 할아버지는 아빠를 정말 무서워해.”
그렇게 다독이며 아이를 꿈나라로 보냈고,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어릴 적 나에게도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했던 사람이 있다. 막내 삼촌이다(외삼촌은 아니다). 지금은 출가해 스님이 되셨지만, 어린 시절 할아버지 댁에 모인 조카들을 작은 방에 이불속으로 몰아넣고는 타임머신을 태워 상상의 나라로 데려가 주었다. 얼마나 신나고 재미있던지, 주말이면 삼촌을 졸라 타임머신 여행을 떠났다. 그 순간만큼은 나 역시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모험가였다. 아이의 상상력이 얼마나 풍부한지, 가상의 세계를 현실처럼 믿어버리니 도파민이 극에 달했을 것이다. 내 아이 역시 지금, 지어낸 내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어 꿈속에서 상상의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을까.


어쩌면 지금 상상의 세계를 떠돌고 있는 건 아이가 아니라 나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들려준 이야기에 온몸으로 반응하던 어린 내가, 이제는 이야기를 만들어 아이를 상상 속으로 보내는 사람이 되었다. 그날 밤 타임머신을 태워주던 삼촌처럼, 나 역시 아이의 기억 어딘가에 남아 있을까.


무서웠지만 따뜻했고, 허무맹랑했지만 진심이었던 이야기로 기억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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