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
오래간만에 만난 그의 이야기에 그녀의 가슴이 뛴다. 남자의 진심이 전달되어서일까? 몇 달 전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며 온전한 자신의 모습만을 봐주길 바랐던 그녀였다. 그때의 남자는 그녀를 외면했다. 불과 몇 달 만에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난 그는 왜 이렇게 바뀐 걸까? 고마우면서도 혼란스럽다. 이 남자의 마음이 진심일까? 나 역시 아직 좋아하는 마음이 남아있는데... 그러다 다시 마음이 바뀌면 어떻게 하지? 머릿속이 복잡하다.
"다시 만나 줘서 정말 고마워."
몇 달 전 그녀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당황스러웠다. 만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그녀와의 결혼을 꿈꾸었던 그였다. 결혼 이후 평범한 삶을 이어가고 싶었는데 자신이 생각한 혹은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결혼생활의 모습에 한 구석이 비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당황스러운 모습을 애써 감춰보려 했지만, 인생 대부분을 눈치 속에 살아온 그녀에게 들켜버리고 말았다. 그날 이후 그녀와의 연락이 되지 않았고, 그 역시 바쁜 일상을 살아갔다.
버림받는 것에 익숙해진 그녀였지만 그를 정말 사랑했기에 한동안 마음이 아렸다. 그래도 살아남아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인생이라는 걸 알기에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며 일상을 살아갔다. 자기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 그녀가 누군가 사귀었다는 것을 몰랐던 주변 사람들이 소개팅을 주선하여도 그녀는 웃어넘겼다. 주말 평소 잘 보지 않던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별로 웃기지도 않는 장면에서 큰 소리로 웃다 결국 눈물이 터져 나왔다. 눈물은 하루 종일 멈추지 않았다.
튀는 것을 싫어했던 그는 누가 보아도 평범의 범주에 들어가는 인생을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그날 이후 그는 그동안 구축해 온 평범한 삶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와 연락이 닿지 않던 어느 날 회사 구내식당에서 반찬으로 나온 진미채를 보다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녀와 했던 한강 데이트 날 그녀가 직접 만들어 온 진미채 김밥이 생각났다. 김과 밥 그리고 진미채만 들어간 그 김밥이 어찌나 맛이 있던지 '맛있다'는 말을 연거푸 내뱉었던 그였다. 그가 그동안 먹어 온 평범한 김밥들과는 사뭇 달랐지만 기분 좋은 색다름을 느꼈다.
답답했던 그는 흐린 주말 동네의 길을 향해 나섰다. 언덕 위 모퉁이에 못 보던 커피숍이 보인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자 혼자 LP판을 닦고 있던 사장과 눈이 마주친다. 바에 앉아 스페셜 티 커피 한잔을 주문했다. 갈아진 원두를 거름망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붓자 검붉은 빛깔 커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다시 또 커피를 매우 좋아하던 그녀가 생각이 났다.
"처음 뵙는 손님이신데 이 동네에 사시나 봐요? 아침 일찍 오시는 분들은 보통 동네 분들 이 시더라고요."
콧수염을 멋지게 기르고 모자를 깊이 눌러쓴 멋진 중년의 사장이 말을 걸어온다. 평상시라면 귀찮았을 텐데 오늘따라 말을 걸어줘 고마웠다. '그렇다'라고 대답한 후 갑자기 그녀와 있었던 일을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담담히 그녀와 있었던 이야기를 건넨다.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유심히 들어주던 카페사장이 살짝 주름진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손님 아직 그 여자분을 잊지 못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맞죠? 그런데 뭐가 두려우신 거죠? 다시 찾아가 매달리면 거절당할까 봐? 아니면... 그녀와 결혼하면 세상 사람들이 정해 놓은 평범의 기준에 부합되지 못한 것 같아서 인가요?"
"둘 다 인 것 같습니다. 저는 참 비겁한 것 같아요."
"아뇨, 누구나 그럴 수 있습니다. 제 이야기 좀 해 드릴까요? 저는 조금 이른 퇴직을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퇴직당한 거죠. 별로 애정도 없었던 회사였지만 집 밖으로 잘 나가지 않고 한 2년 넘게 방황을 했습니다. 집에 눈치가 보이기도 해 늘 집 근처 가까운 커피숍에 앉아 커피를 마셨죠.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이 커피숍을 해보면 어떨까였습니다. 그런데 주변에 말을 하니 '우리 동네에 커피숍이 몇 개인 줄 아냐'부터 시작해 부정적인 말을 늘어놓더군요. 의지가 약했던 저는 역시 하면 안 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자꾸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오십 넘게 살아오면서 그런 경험은 흔치 않았습니다. 그런 소중한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지난 1년 동안 커피를 공부하고 이 작은 공간에 커피숍을 차렸습니다. 그랬더니 주변의 사람들이 그때부터 저를 칭찬하더군요. 늦은 나이에 도전하는 모습이 멋지다며 잘했다고요. 참 이상하죠? 정말 좋아하고 해보고 싶은 일을 하는데 누군가의 생각이나 그들이 세워놓은 기준들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더군요. 막상 저에게 부정적인 이야기를 했던 사람들은 저에게 크게 중요치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건 일이나 사람 모두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마침 이번 주말이 그녀가 좋아하는 전시회가 시작되는 날이다. 핸드폰을 켜 메신저를 열고 용기를 내 안부를 묻는다. 얼마 되지 않아 그녀에게 전송된 메시지에서 숫자 1이 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