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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덩크

예찬주의자

by 매버지

2023년 초, 나는 플랫폼 스타트업을 떠나 애니메이션 IP 회사로 직장을 옮겼다. 그리고 마치 운명처럼 그즈음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가 한국에서 엄청난 신드롬을 일으켰다. 결혼 후 처음으로 아내에게 심야 영화를 혼자 보러 가도 되겠냐고 허락을 구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설렘을 안고 3살 배기 딸과 아내를 집에 두고 용산 CGV로 향했다. 심야였지만 극장 안은 예상보다 많은 관람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의 오프닝 테마가 흐르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영화의 제목은 '더 퍼스트 슬램덩크'였다.


일본 만화 슬램덩크(SLAM DUNK)는 1990년 주간 소년 점프를 통해 연재를 시작했고, 우리나라에서는 1992년 소년 챔프를 통해 소개되었다. 1994년, 장동건과 손지창이 주연한 농구 드라마 마지막 승부가 큰 인기를 끌며, 당시 한국 농구 열풍과 함께 슬램덩크는 전설이 되었다. 나 역시 그 영향을 받아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농구공 하나로 아파트 가로등을 골대 삼아 슛을 던지곤 했다.


만화에 조예가 깊지는 않았지만, 어릴 적부터 일본 만화의 그림체에 끌렸다. 초등 저학년 시절, 스트리트 파이터의 베가 캐릭터를 수백 번이나 따라 그렸다(훗날 베가의 서사를 알고 충격받았...). 포스터 속 베가의 모습은 게임보다 훨씬 멋있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일본 만화 특유의 섬세한 작화에 매료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슬램덩크를 접하며 그 감정은 확신이 되었다.

당시 최고 인기를 끌었던 드래곤볼이 비교적 단순한 그림체였다면, 슬램덩크는 디테일이 살아 있었다. 등장인물들의 표정, 땀방울, 근육선 하나하나가 생동감 넘쳤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정교해지는 작화는 단행본을 다시 펼쳐볼 때마다 감탄을 자아낸다.


슬램덩크에는 수많은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한다. 대부분의 만화가 몇몇 주연 캐릭터에 집중되는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조연조차 빛났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불꽃남자 정대만'이다. 중학교 시절 최고의 선수였지만 발목 부상 이후 방황하던 그가, 3학년이 되어 농구에 대한 열정을 되찾고 다시 코트로 돌아오는 과정은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의 성장 서사는 내 학창 시절 농구 슈터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만들었고, 나 또한 동네 농구코트에서 수없이 3점 슛을 연습하게 했다.

그리고 메인 캐릭터가 아닌 인물 중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안경 선배 권준호'다. 북산고 농구부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자는 아니었지만, 주장 채치수를 묵묵히 도우며 팀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위기의 순간마다 등장해 중심을 잡아주는 존재였다. 학창 시절, 특출 나게 잘하는 것도 없고 튀는 것도 싫어했던 나는 그의 조용한 카리스마와 리더십이 너무나 닮고 싶었다.


누군가가 성장하고, 역경을 극복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마음을 움직인다. 슬램덩크는 그 공식에 충실한 작품이다. 농구에는 관심조차 없고, 문제를 주먹으로 해결하던 강백호가 코트 위에서 진정한 선수로 성장하는 과정. 그가 농구 초보자로서 오랫동안 연습했던 레이업 슛을 따라 하며 나도 수없이 농구공을 던졌다. 그 슛이 자연스러워지는 순간, 그가 느꼈던 환희를 함께 맛본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안 감독님. 사연 많고 불량아 같던 아이들에게 동기부여하고 변화를 이끌어낸 그를 보며 생각했다. 내 곁에도 저런 어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전국대회에서 북산고가 최강 산왕공고를 꺾는 순간, 그들의 성장과 팀워크가 절정을 이루는 그 순간까지, 나는 마치 팀의 일원처럼 가슴이 뛰었다.


1990년대, 농구를 좋아하던 사춘기 소년은 어느새 40대 중반이 되었다. 그리고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마주했다. 극장에서, 스크린 속 북산 5인방이 한 명씩 스케치되며 등장하는 순간. 전율이 흘렀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내내 감탄하고, 웃고, 눈시울을 붉히고, 가슴이 뛰었다. [설렘임이 뭐야]라고 했던 작년 10월의 내가 무색해질 정도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슬램덩크 앞에서는 아니었다.

얼마 전, 쿠팡플레이에서 다시 한번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봤다. 시간이 부족해 중간중간 스킵하며 보았지만, 사춘기 시절의 나를 다시 발견하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이렇게 열광하는 걸 보면, 슬램덩크는 나에게 단순한 만화가 아니다.


나는 슬램덩크를 예찬한다. 아내는 영화 보고 와서 충동구매한 슬램덩크 단행본 전집을 당근마켓에 내놓으라고 하지만,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보고 있지? :)



그런데... 4권은 어디 갔지?


THE FIRST SLAM DUNK OP&ED Thema

https://youtu.be/UCvCyAGs5X8?si=x-gwpEn2aLlTloyI


메인 이미지 출처 : CG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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