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락 리셋하기
오랜 세월을 함께 산 부부에게는 그들만의 맥락이 있다. 그 맥락은 맥락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는 작동하지 않는다. 같은 것이 입력되어도 맥락 함수를 통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맥락 함수를 공유하는 부부에게는 그 맥락 안에서 읽히기 때문에 매번 비슷한 장면에서 걸려넘어진다.
Case 1
밤 늦게 라면을 끓이는 남편.
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는 아내.
뭐가 문제죠?
그들에게는 그게 큰 싸움거리다.
내가 음식해서 냄새 좀 난다고 지금 이렇게 티를 내냐? 이 사람은 내가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이런 식으로 마음에 안 든다는 티를 낸다니까.
아니 밤에 음식을 먹는 게 좋은 일도 아니고, 나도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픈데 어떡해. 환기 잠깐 한 게 그렇게 화를 낼 일인가?
Case 2
이사를 일주일 앞둔 어느 날.
간단히 점심을 먹으러 교외로 나간 부부.
아내는 꾸덕꾸덕 말린 생선을 몇 마리 사고 싶었다. 자주 나오지 못하는 곳이었고 곧 이사는 가지만 인테리어 하는 동안 묵을 숙소에는 냉장고가 충분히 큰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걸 사면 한동안 맛있게 잘 먹을 것이고 냉장고에 생선이 들어있는 동안 든든할 것이다.
남편은 생선을 사겠다고 흥정을 하고 있는 아내를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곧 이사를 할텐데 지금 안 사도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는 걸 굳이 사겠다는 걸까. 이사를 앞두고 맹렬히 비워도 모자랄 판인데. 먹을 사람이라고는 노부부밖에 없고 아침은 밥이 아닌 간단한 음식으로 대체한지 오래고 점심은 아내의 수고를 덜어주려고 나가서 먹는 경우도 많다. 저 사람은 왜 저리 뭘 사들고 오지 않으면 못 견디는 걸까.
Case 3
옷 좀 그만 사. 옷 사서 슬쩍 옷장에 넣어놓고 원래 있던 옷이라고 둘러대지 좀 마.
신발 좀 그만 사. 신발장에 니 신발이 나머지 식구들 신발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아.
나는 너처럼 백오피스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야. 남들 앞에 나서야 되는 사람이라고.
그런 소리는 나한테 옷 한 번이라도 사주고 말해.
누구의 입장이어도 다 이해되고 그럴 수 있는 말들이다.
남이었으면 아유 이 밤에 라면을 드시게요? 내일 아침에 속 안 좋으실텐데~ 저 잠깐 환기 좀 할게요~ 하면 될 일이고.
아, 출출해서 잠이 안 오네요. 네, 냄새 많이 나죠? 제가 문 열어놓을게요. 죄송합니다~ 할 일이다.
남이었으면 이사 일주일 전에 생선을 더 사든 말든 누가 뭐라겠는가. 본인이 감당하겠다는데.
남이었으면 옷 사고 구두 사는데 얼마가 들었든 무슨 상관인가. 멋지게 차려입은 모습만 보는데.
은행 창구에 앉은 직원처럼 사람을 상대하는 직종의 사람이 손톱이나 눈썹을 전혀 관리 안하거나 화장을 안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약간 갸우뚱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시댁, 친정, 결혼 않고 함께 사는 자매, 사는 얘기를 들어보면 관계의 역사, 맥락의 자기장이 없는 사람들끼리는 얼마든지 서로를 배려하고 순하게 넘어갈 수 있는 일에 번번히 같은 턱에 걸려넘어지고 지지고 볶는 모습을 본다. 어찌나 똑같은 양상인지 10년 전 이야기인지, 1년전 이야기인지, 며칠 전에 일어난 이야기인지 구분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어떨 때는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한 반응인데 상대는 관계의 역사 속에서 해석하고 알아서 증폭하고 확대해석하며 화를 내서, 상대에게 그런 뜻이 아니라고 설명하다가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물론 반대 경우도 있다. 나는 그의 말을 기존의 그와 나의 관계에서 해석하고 상처받았는데 그는 그런 뜻이 전혀 아니라고 하며 억울해 하는 것이다.
그럴 때 회의감이 든다.
함께한 시간이 더 좋은 방법으로 쌓일수는 없나?
이러려고 그 세월을 함께 살았나?
이렇게 계속 관계가 고착된다면 누구에게도 좋을리 없다.
올해는 내가 가진 관계의 나쁜 자기장을 리셋하고 싶다. 남편과도 아이와도.
그러기 위해 먼저 나부터 가장 가깝고 소중한 사람들을 가장 적게 배려하는 언행을 고쳐보려고 한다.
기존의 관계 속에서 문제가 있었던 상황들을 복기해서 이렇게 흘러가면 안되는 것이구나 알아차리고 빠르게 사과하기. 상대를 인정하는 말하기, 북돋아주는 말하기,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를 제일 많이 말하기.
내 인생의 VIP들인 가족들을, 내가 가장 존중하는 친구를 대하듯이 이해하고 배려하기.
삐딱하게 쌓여온 맥락 리셋하기.
60살의 내가 더이상 같은 턱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40대의 내가 주는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