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도시, 숙소 전쟁
시카고 도심의 관광객이 눈에 띄게 많지는 않았지만 추석연휴라서 한국인이 평소보다는 많았을 것이다. 숙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도심의 숙박비는 뉴욕과 비슷하게 시작했고 타협 가능한 중간 가격대가 그때까지는 전무했다. 예산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는 빈방이 드물어서 연박을 할 수 없었다.
겨우 연박이 가능한 숙소를 찾아봐도 9월에는 2박이 최대였다. 이 숙소 전쟁은 마이애미와 뉴욕을 거쳐 남부까지 다녀온 뒤에도 계속됐다. 돌아온 10월에는 시카고 마라톤이 열리고 있었고, 아는 숙소들은 다 매진이었다.
그러나 모든 전투에서 끝까지 싸우고 살아남았다. 귀국 전 마지막 4일은 어마무시한 가성비로 쾌적한 호캉스를 즐길 수 있었다. 도심 4인실과 별 차이가 없는 비용으로 부도심에서 킹사이즈 침대와 데이베드를 보유한 킹 룸 또는 퀸사이즈 침대 두개가 들어가고도 허허벌판인 스튜디오를 구한 것이다. 두 곳에서 보낸 4박의 비용은 서울집 한달의 월세를 웃돌긴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더 좋은 숙소를 찾기 위해 검색하고 또 검색한 덕분에 피곤한 마지막주를 편하게 보냈다.
다시 9월로 돌아오자. 첫째날은 저녁에 도착했고 다음날 미술관에 갈 예정이라 시카고 루프 근처의 8인실에서 묵고 조식도 제공받았다. 어차피 숙면은 기대도 안 했지만, 시설은 쾌적했다. 둘째날 미술관 가기 전에 체크아웃 후 별도의 라커에 짐을 보관해두었다. 오후에 미술관에서 퇴장하자마자 짐을 찾은 상태로 리버노스의 카페에서 점심을 먹은 것이다.
이제 두 번째 숙소에 체크인을 하러 가면 된다. 두 번째 숙소는 4인실의 1박, 다음 날 또 다른 곳의 4인실로 이동을 해야한다. 2번 숙소는 각 투숙객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협소한 대신, 나름 세심하게 설계하고 데코한 곳이라 아늑하고 쾌적했다.
여러명이 사용하는 합숙 도미토리 중 이층침대는 시카고 2번, 3번 숙소와 옛날 보스턴의 숙소가 가장 좋았다. 나머지는 철제프레임이라 숙면은 불가능했다. 보스턴의 숙소는 아쉽게도 욕실이 외부에 있었는데 시카고 2번 숙소는 가격*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최고였고, 3번 숙소가 그 뒤를 이어서 나름 만족했다.
*추가로 장부를 확인해보니, 2번 숙소의 1박이 3번 숙소의 2박보다 몇 달러 더 비쌌다. 하룻밤 기준으로 2번 숙소는 가격이 2배 이상이었고 같은 가격대인 1번 숙소는 침대 퀄리티가 낮으므로 가성비는 3번 숙소가 최고였다. 그럼에도 호텔 소속인 2번 숙소만의 '완성도'는 인정한다.
대신 짐정리를 매번 새로 해야하는 중수는 공간이 협소한 2번 숙소와 같은 곳에 재방문을 하려면 짐싸기 레벨업을 해야한다. 예산에 맞춰서 이곳저곳 옮겨다니다 보면 실감하게 되는 '쾌적한 숙소'의 상징이 있다. 눈부시게 하얀 침구와 적당히 넓고 반짝이는 욕실, LG가전이다. 지난 세기의 구식 LG가 LG이기 전부터 알았고 너무 흔해서 눈여겨보지도 않았던 이 로고가 해외에서는 쾌적함을 상징하는 공간마다 눈에 띄는 곳에 전시된 것을 보면 신기했다.
한국, 일본, 독일의 수많은 전자제품과 자동차 브랜드 로고를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는데 유독 숙박업소에서는 LG가 시선강탈을 했다. 분명 10년 전까지는 애플 일색이던 미국드라마 속의 모바일 기기도 갈수록 삼성, LG 등으로 다양해지고 있다. 실제로도 해외에는 한국산이 더 많다.
미국 여행을 앞두고 아이폰으로 환승해서 같은 기기를 7년 이상 쓰고 있다보니 국내 아이폰 유저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느꼈고, 이에 대해 농담으로 '미국에서도 한국사람만 아이폰을 쓴다.'고 했었다. 실제로는 미국에서 현지인을 다양하게 만났다고 할 수는 없으니 성급한 일반화 또는 어그로 마케팅(?)을 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만날 일이 없는 1%의 부유층이 모두 애플을 사용한다 해도, 나머지 99%의 보통사람들은 점점 다양한 기기를 사용하게 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정작 한국산으로 시작했던 한국 사람들은 이미 그 단점까지 알기 때문에 취향에 따라 아이폰으로 이동하는 그룹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좁지만 쾌적했던 두번째 숙소에서 맞은 셋째날은 날씨가 변화무쌍했다. 브런치를 먹고 강변산책을 하는 동안 하얀 하늘이 파란 하늘로 변해갔고 정오 무렵에 들렀던 한적한 공원에서 셀피를 찍어보려고 했지만 직사광선의 눈부심에 굴복했다. 오후에는 적당히 햇살을 가려주는 반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신나게 촬영을 했다. 촬영을 목적으로 구두를 챙겨서 가방이 볼록했지만 구두는 5분 정도밖에 못 신었다. 이미 상당한 거리를 걸었고, 남은 시간 내내 돌아다닐 예정이라 크록스와 한 몸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비치드레스가 건축의 도시와 이렇게 잘 어울릴 줄 몰랐다. 정작 비치가 있는 마이애미에서는 한번도 입지 않았다. 시카고 강변을 사로잡은 그 착장 그대로 네이비피어까지 갔다. 항구 근처의 비치 아닌 비치도 잠깐 들렀다. 해는 내려오고 있는데 하늘은 점점 흐려졌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