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
발이 달린 것은 깊숙한 산으로 쫒겨날 것이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불태워지거나 땅에 묻힐 것이다. 그 후엔 두 발로 서서 걸어 다니는 새로운 원숭이들이 이곳에 들이닥칠 것이다. 이 동물들은 밀림 속 나무들을 마구 베어 버리고 먼 곳까지 훤히 보이는 들판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 말하는 개척인가 보다.
-116p, 교통망 개척을 위한 포로들의 대이동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군속인 '포로감시원'으로 참전했다가, 일본의 항복 선언 이후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던 최영우님의 에세이를 사후에 그의 외손자가 엮고 풀이한 책입니다. 최영우님은 무명인 기록자였지만, 군대 대신 포로감시원으로 태평양 전쟁에 자원하고 그 곳에서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사람들을 관찰한 그의 문장을 읽다보니 전쟁이라는 배경이 아닌 그냥 여행기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한편으로는 전쟁이라는 배경을 군인도 민간인도 아닌 시점에서(물론 이 태평양 전쟁의 극악함을 증명하는 위안부라는 존재 역시 이 책을 포함한 많은 문헌에 등장하겠죠.) 밀착해서 관찰하고 상세한 기록으로 남겨주신 덕분에 '포로감시원'이라는 신분과 더불어 현장의 생생한 증언들을 알 기회가 생겼습니다. 세상의 모든 곳을 가보지는 못하겠지만 (물론 갈 수 있다면 가보고 싶긴 합니다. 무한한 자원을 가진 체격 좋은 백인 남성이라면 가능할까요?) 세상 모든 곳의 이야기는 읽어볼 수 있을텐데.
어쩌면 '랜선여행'시대가 여행자와 독서가 또는 둘 다인 사람들에게 더욱 풍부한 간접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화를 읽는다는 것, 게다가 이 경험으로 이후의 삶이 달라진 저자의 현장 목소리를 직접 청취한다는 것은 매끈하고 가벼운 독서가 아닙니다. 확실히 제 취향은 아닌데요.
그럼에도 승자가 아닌 무명씨의 역사 기록(분명 이 분은 세계적인 저널리스트가 되고도 남을 재능을 가지셨는데), 외할아버지(평등한 호칭은 아니지만 편의상 엮은이의 표현을 따르겠습니다.)에 대한 애정을 담아 그 당시의 세계사를 비교, 대조한 어느 콘텐츠 전문가(=엮은이)의 체계적인 전달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기를 바랍니다.
전쟁터에서 인간 하나하나의 운명은 군 간부들 책상 위의 명부 안에 체크된 점의 형태로 결정된다.
-87p, 자카르타 총분견소로 이동하다
일본군이 가는 곳에 항복이나 후퇴는 없었다.
패전을 해도 오직 전멸과 옥쇄가 있을 뿐이었다.
-133p, 친구의 충격적인 증언
날짜의 신을 사귀어 놓으면 앞으로 또 다가올 날들을 빨리빨리 지나가 버리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그것은 무서운 일일 게다. 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 이 전쟁이 끝나지 않으면 나는 이 고뇌와 서러움을 어디에 배설할 것인가. 역시 날짜는 순리대로 24시간씩 흘러가는 것이 좋겠다.
-136p, 친구의 충격적인 증언
그는 소네처럼 악질 인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간다 대위와 같은 호인도 아니었다. 그는 부하를 통솔하려면 상하의 의사소통이 필요하다며 매주 회식을 벌였다. 회식 자리에서는 설교 같은 것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자기 할 말만 했고, 부하의 말을 듣는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144p, 글로독 수용소로 전근하다
나는 속으로 국제결혼이 인류 평화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148p, 포로가 된 독일의 잠수함 승무원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적용되는 말은 "겉으로 울지 말고 속으로 울어라. 웃지도 말고 속으로만 웃어라."가 아닐까. -156p, 천황의 축어를 읽다
나는 그녀가 일본 군복을 입고 머리의 아래쪽을 깎은 채 전투모를 써 신분을 위장하고, 명부에 이름을 올려놓고 우리와 같은 숙소에서 대기하다가 운이 따른다면 함께 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예상할 수 없는 곤욕의 길일 수 있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166p, 조선인 민회 결성
세계의 여론은 약소국가의 자주권을 옹호했다. 소련은 영국군의 즉각 철수를 요구해 독립군의 사기를 고무시켰다.
-169p, 인도네시아 독립군과 화란군 사이의 전투
나는 여기서 우리들을 학생이라 지칭해 본다. 오늘부터의 생활은 과거에 우리가 경험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고 모든 것을 하나하나 새로이 배우는 삶이기 때문이다. -181p, 싱가포르 창이 전범 수용소
현장 기록과 취재를 바탕으로 20세기를 되돌아본 문학 작품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읽던 시기에 만나게 된 <알로하 나의 엄마들>을 비롯한 작품들이 그랬고, 앞으로도 더 많은 역사 소설이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관점으로 다시보기를 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