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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Oct 30. 2023

박애주의자

단편소설 <몫과 나머지>

나는 내가 박애주의자라고 생각했다. 인간을 혐오하면 내 마음이 지옥에서 불고문을 당한다. 인류애를 장착하면 남들이 나를 질투하거나 물어뜯어도 나는 나만의 행복한 버블필터 속에서 숨쉴 수 있다. 다만 여전히 스스로를 투명인간처럼 느껴야 하는 (내 기준에서 가장 무안한) 상황은 적응이 어렵다.


뭐였더라....


지난 이십년 동안 가장 나를 화나게 했던 사람은 쉴새없이 자기의 영토라고 생각하는 범위의 벼랑끝으로 나를 내몰았고, 여차하면 심바 삼촌처럼 나를 내동댕이 쳤는데 (물론 그녀는 내 동생도, 이모도 아니다!) 지금은 그녀의 영토 따위는 우습지도 않을 뿐이다. 내가 좋아하고 의지했던 힘없는 언니들은 그래도 내가 무적의 손톱으로 벼랑을 몇번씩 기어올라가는 것을 지켜봤기에 감탄을 거듭했다. 이 독기는 언니들의 믿음에 대한 보답, 타고난 승부욕, 그리고 예술에 대한 열등감의 콜라보레이션이었다. 나중에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내가 그녀에게 분노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정작 당사자는 '몰랐어.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해.' 정도로 갈음했다고 하는데, 그게 청춘의 3년을 (비유적으로) 암벽등반에 바친 사람에게 할 소리인가. 어쨌든 내가 무르익어갈수록 그녀는 빛바랜 고성이 될 뿐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그까짓 영토, 다 뺏을수도 있지만 나는 '너의 리그'가 아니야.


나를 증오하는 동안 지옥에 살았을, 그러나 정작 증오해야 할 타이밍에는 감히 증오하지도 못하고 있는 물컵 속 올챙이는 잊고 흘려보내자. 품고(?)가야 할 올챙이가 어디 그녀뿐이겠는가.




작업실을 완전히 독립하고 나서 영신을 자주 볼 수 있게 됐다. 나는 정말로 힘들기도 했지만 힘드니까 도와달라는 핑계로 그를 소환했다. 결과적으로는 성과가 없었지만 내적 만족감 같은 것이 있었다. 그와 함께 무언가를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 엄청난 발전으로 느껴졌다. 실체는 공갈빵일지라도 내가 전보다 성장한 포지션으로 그와 협상할 수 있다는 것이 뿌듯했다. 그는 과거의 내 열등감을 모를수도 있다.


여전히 약간은 두려웠지만 티 내지 않으려고 허세를 부렸다. 허세라는 것을 알았을까? 내가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와 둘만 있을때 본질에 가까워진다. 영신도 그랬다. 오히려 사람들이 많을 때 공작새처럼 허세를 부렸지 둘만 있을때는 차분하고 진솔했다. 내가 망친 것 같다.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친구들이 나를 약하게 보는 것이 싫었다. 내가 대표하는 단위나 모임의 구성원이나 스텝이 사석에서 나를 그냥 '연인'처럼 대하는 것을 못견뎌했다.


이건 좀 긴 얘기가 될 수 있지만 요약하면 내가 남자친구였다면 (상대방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하지 못했을 말이나 행동을 여자친구라서 (특히 상대방이 남성일때) 쉽게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내 여자라는 핑계로 나를 자신의 지위 혹은 그 이하로 강등시키려는 남자친구(혹은 여자친구)는 응징했다. 뒤로 갈수록 불행해진다. 뒤에 있는 사람은 앞 사람들의 과오(와 그에 따른 나의 복수)를 이어받는다. 뭐,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영신은 그런 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였다. 그는 모든 면에서 월등했지만 메타인지가 그 이상이었다. 그러니까, 정말 고수는 자신이 고수 중에서 어느 정도인지까지 알아야 하는 법. 그런 점에서 늘 자신감이 넘치는 동시에 부족한 연수는 진정한 고수라고 할 수 없었다. 지성은 애초에 고수가 될 생각이 없는 독불장군이었다. 하지만 연수나 지성은 한순간도 내 연인이었던 적은 없으니 나를 본인에게 가두거나 내 결정권에 대해 선을 넘은 적은 없었다.


나 역시 그들의 장점을 존중했기에 친구처럼 지내는 동안에도 선배 대접에 소홀하지 않았다. (잔소리는 듣는 척만 했다.) 영신과는 불확실한 예비 연인 상태로 시간만 흘러갔다. 하지만 다른 남자친구들의 열등감이 오히려 어떤식으로든 나를 끌어내리려고 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영신은 반대로 스스로를 존중하기에 나를 존중했던 사람이다.


왕은 왕후에게 존칭을 쓴다.




열등감은 내쪽에 있었다. 나는 영신과 연이 닿았던 오랜 세월동안 내가 시도한 대부분의 것들이 결과적으로 실패했고, 그 민낯을 그에게 보여줄 수 없었다. 그가 항상 나를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대했기 때문에 내 가능성과 현실 한계의 차이에 항상 좌절을 잔뜩 머금은 상태였다. 그런 마음을 숨기려고 허세를 부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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