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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Nov 13. 2023

몫 그리고 나머지

단편소설 <몫과 나머지>

그에게 거절당할 것을 각오하고 두 번이나 협업을 제안했다. 첫 번째 제안은 이미 진행중이던 협업의 구두계약 조건을 변경하자는 의견인데, 원산지가 내 머릿속은 아니어서 부담이 덜했다. 그래봐야 서로 이용해보자는 의미의 다소 치사한 의견이었고, 아이디어는 내 것이 아니되, 협업의 당사자인 내가 직접 이야기를 해야하는 상황이 부끄러웠다. 플랜 B에서 해고(?)당하는 사람이 나였다면 펄펄 뛸 수도 있는 제안이었고, 예상대로 그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의 인품을 계속 믿을 수 있어서 안도했다. 그래, 공과 사는 구별해야지. 두 번째 제안은 나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그에게 전혀 필요하지 않은 작품을 함께 준비하자는 제안이었고 발상부터 순수하게 내 머릿속에서 출발했다. 이 의견은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계획이었지만 시도라도 해보고 싶었다. 무모한 생각이었다. 차라리 다른 제안을 했어야 했다. 일 욕심을 좀 내려놓고 사람에게 집중했더라면 좋았을텐데.


그러기엔 너무 어렸다. 뭐 하나라도 쥐고 싶었다. 그게 그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존재감은 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미인계로 획득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사랑보다 비즈니스가 먼저였다. 그랬던 나를 원망하는 중이다. 비즈니스는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면 재능과 무관하게 (아주 무관하지는 않게) 획득할 수 있는데 그걸 깨닫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렇게 실패한 경험을 바탕으로 꾸준히 실패해서 타율을 높여온 다음에야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사랑은 두번 다시 오지 않았다. 다시 그런 사랑을 하려면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무 경험이 없는 사람처럼 처음부터.




나의 몫은 그의 빈자리였다. 이 자리를 비워둔 채로 살면 공허해지는 그런 빈자리였다. 아무리 방이 많은 구중궁궐이라도 가장 중요한 방은 단 한 칸이다. 그 자리에서 그가 나간 뒤, 아무도 들어오지 못했다. 그가 돌아올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


두 번의 무리한 제안을 하고 나는 탈진했다. 이제와서 그에게 매달리기엔 그동안 센 척을 너무 많이 했다. 성주와의 잘못된 만남도 말할 수 없는 죄악이었다.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려면, 내가 외도를 한 정도가 아니라 심각하게 잘못 살았다는 고백을 해야할 판이다. 말하지 않으면 모를 수도 있고 모른 척 해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부정직한 관계를 감수할 정도로 형식적인 결합은 아니었다. 그의 외모나 인프라를 노리고 사랑했다면 전략적으로 접근하여 이 관계를 과시했을 것이다.


나는 헤어지기 싫었지만 헤어져야 하는 순간을 감수했다. 애초에 함께하자고 한 적이 없었다. 우연히 옆에 있을 때 놔주지 않았고 그가 나를 초대했을때도 둘 중 하나에게 다른 일정이 닥치기 전까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보고 싶다, 내일 또 만나자, 다음주에도 만나자,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결과는 처참했다. 업무 관계가 종료된 후로 성주의 일도 있었지만 그 후로 시간이 흘러 개인적인 연락을 하기가 부담스러웠다.




그와 나는 '그 중에 한 명'으로 오랫동안 공존했다. 협업이 끝나고 2년 뒤에 그가 갑자기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의 마음은 모르겠다. 짐작하고 싶지 않다. 그 후로도 거의 십년을 공존했지만 따로 만난 건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자연스럽게 스쳐가는 동안 개인적인 질문이나 근황 보고는 하지 않았다. 전해 들은 가십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봐야 머나먼 과거가 된 이야기들 뿐이다.




그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는 비슷하게 일정한 패턴으로 살아왔고 머나먼 핀란드에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 친구들에게 말하면 자일리톨 사업하냐는 대답(?)이 돌아올 것 같은 맥락없는 소식이었다. 언젠가 친구들에게 이탈리아에 가고 싶다는 말을 했더니 피자 먹으러 가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게 빈자리를 주고 그는 온전히 그의 전부를 가져갔기를 바란다. 나에게 주지 못했거나, 나로부터 받지 못한 것을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그립지만 내 몫은 그의 빈자리다. 욕심내지 않을 것이다. 그가 나를 그리워한 적이 있다는 물증(?)은 고통이다. 알고 싶지 않다. 그의 나머지는 그의 전부여야 한다. 나는 빈 방을 부수고 아무것도 들이지 않은 새로운 빈 공간을 마련할 것이다. 이름모를 누군가가 타인의 흔적을 발견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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