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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Feb 26. 2024

내 안의 구린 놈을 발견하라

엘레나 페란테 <어른들의 거짓된 삶>

나는 이제 순수한 아이가 아니었다. 생각 이면에  다른 생각이 있었다. 나의 유년시절은 끝났다.

-168p




나폴리 4부작 말미에 등장하는 '잃어버린 아이' 티나 또는  놀이친구였던 레누의 막내딸, 임마가 성장한 듯한 사춘기 소녀 '조반니' 레누와 같은 세대인 아빠 주변의 어른들을 관찰한다. 이미 한참 전에 어른들의 세계에서 주어진 역할을 맡았겠지만 내내  이면을 탐구함으로써 '인간 너머의 인간' 경지에 오른 관찰자, 엘레나 페란테의 <어른들의 거짓된 >에서 '어른들' 연기는 영특한 조반니에게 들통나고 역관광을 당한다.


알고보면 아빠나 고모나 거기서 거기였어, 정도의 깨달음은 13세가 16세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에피소드. 사건과 대사 하나하나를 미분하면서 조반니의 작은 세계에 점점 금이 가는 괴로움에 공명하다 마침내 그 세계가 깨지는 순간, 안타까움을 남기고 이야기는 갑자기 끝난다.


그래서 다음편은 언제 나오는거죠?




릴라가 연상되는 동시에 유바바(?) 연상되는 빅토리아 고모의 애틋한 사랑에도, 우연히 발견한 엄마의 수상한 스텝에도 반전은 있다. 이야기의 정중앙에 등장하는 문제의 로베르토는 '니노' 닮았으나 그보다 한층 멋있다. 아빠와 고모의 폭풍같은 막장드라마 속에서 사춘기를 겪고 있는 조반니의 첫사랑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조반니는  운명에 굴복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는다. 악의없이 잔인한 줄리아나, 그녀는  승리감을 평생 모를 것이다.




​빅토리아 고모의 목소리에는, 아니 그녀의 몸에서는 날것 그대로의 다급함이 느껴졌다. 성냥으로 가스에 불을 붙이려다가 가스레인지 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꽃에 손이 닿았을 때처럼 나는 단숨에 그 감정에 사로잡혔다. -68p


어느 날 오후, 결국 나는 시험 삼아 내 거짓말을 실천했다. 나는 옷을 벗고 어머니의 보석만 몇 개 걸친 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비참했다. -84p


아버지와 빅토리아 고모가 화해하면 우리의 만남이 더는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빅토리아 고모의 친구이자, 심복이자, 공범의 지위에서 일개 조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109p


벅찬 목소리로 말하면서 나는 거짓을 진실인 것처럼 말하는 내 능력에 감탄했다. 효과적인 단어 선택 능력에 놀랐다. 내가 고모와 닮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더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246p


그렇지 않아요. 마리아노 아저씨는 대학교수이고 아빠 기분을 맞춰주는 데다 아저씨랑 함께 있으면 아빠가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지니까 화해한 것이고 빅토리아 고모와 있으면 아빠 본모습이 생각나니까 그러는 거예요. -264p


아빠한테는 복음서 이야기를 하지 마라. 토론한답시고 네 독서를 망쳐놓을 거야. -288p


로베르토는 자기 뜻을 고수하면서 그 누구와의 관계도 끊지 않아. -323p


시인이 우리가 쓰는 평범한 단어를 취해서 대화라는 형식에서 해방시키는 순간 평범한 단어들은 예기치 못한 에너지를 발산해. 하나님도 그런 식으로 나타나시는 거야. -341p


​인간의 본모습은 모든 것을 명확하게 볼 수 있을 때 드러나는 걸까, 아니면 증오나 사랑처럼 농도가 짙고 무거운 감정에 의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질 때 드러나는 것일까. -376p


여행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모르는 것이 없고 지성과 외모와 성품이 특출나고 나 혼자서는 절대 깨닫지 못할 사물의 가치를 설명해주는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410p


그녀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아마 악의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저 그런 식으로 자신의 행복에 형태를 부여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냥 스쳐 지나가 버릴 그 순간을 나에게 직접 보게 해서 나를 산증인 삼아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게 나의 등장을 이용한 것이다. -426p




아버지의 지성을 흠모하지만 동시에 나름 욕망에 솔직한 아버지와 고모 남매를 빼다박은  여사친 은밀한 시간을 보내는 조반니. 그러나 책을 아무리 읽어도 실천에는 시간과 용기와 행운이 필요하다.


그 시절, 우리에게 아무 일이 없었던 건 다행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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