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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Mar 05. 2024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함축적이고 여백이 많은 글로 분위기나 감정을 오히려 정확하게 전달하는 클레어 키건은 "애쓴 흔적을 들어내는 데 많은 공을 들인다"며 "애써 설명하는 것보다 독자의 지력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102p, 옮긴이의 말(허진)




생략된 부분을 구체화하는 훈련이 필요한 경우가 있었다. 타인과의 비문학적 소통을 위해, 먹고 살기 위해, 같은 목적을 함께 이루기 위해. 내게 생략하는 습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은 합당한 이유로 나를 떠나갔지만 사회생활의 꿀팁은 남겨주고 갔다. 그때의 나는 그 중요하다는 눈치도 없었고, 인간관계를 조율할 줄 몰랐고, 저자세를 취해야만 하는 타이밍이 반드시 존재함을 이해도 인정도 못했다.




항상 '혼날' 준비를 하고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맡겨진 소녀’는 민감하게 분위기를 감지하고 어른들의 관계를 관찰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하되 뚱하거나 무뚝뚝하게 굴어서 타인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불편한 건 언제나, 그녀 자신이다. 그렇게 훈련을 받으며 성장을 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수없이 해고를 당하고 겨우 두 번째로 사표를 제출한 뒤, 두번 다시 을이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삶이란 항상 갑일수도, 항상 을일수도 없다. 그러나 밥줄은 무섭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계약만이 을에게도 협상카드를 부여한다. 어차피 맞춰준다고 영원하지 않다면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양보하고 중간 지점에서 화해할 수도 있다. 영구퇴사자라고 해서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화해를 잘 못하는 성격이라면 더더욱.




내가 아쉽지 않은데도 상대방의 뚱함을 견뎌야 하는 순간이 끔찍하게 싫었다. 그건 주로 내가 아직 권위는 없지만 선임자라서 신입들이 내 커뮤니티에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왜 나는 이들에게 상처를 받았는지 되새겨보면, 그런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되돌아온다. 누군가에게 좋은 인상을 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평생 솔직하게 감정에 충실했다. 성인이 되고 대표자가 되어서야 타인의 시선이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생겼다. 그 전에도 그 후에도 트러블은 있었다. 나에게 혹은 타인에게 책임이 있거나, 그 누구의 책임이 아닐 경우에도 무슨 일은 벌어질 수 있다.


​정당하게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고도 군식구나 식충이처럼 자신을 삭제해야 하는 기분은 심성이 고운 아이에게도 상처를 줄 것이다. 나는 심통을 부릴 수 있을만큼 안정감을 과신하지 않았다. 오히려 완벽해야 그나마 인정 비슷한 것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단순하게 필요한 칭찬을 충분히 받지 못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두는 모두에게 항상 칭찬을 받을 자격이 있고, 우리는 항상 칭찬에 굶주려 있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30p


모든 것은 다른 무언가로 변한다. 예전과 비슷하지만 다른 무언가가 된다. -33p


그런 다음 아주머니가 머리빗을 꺼내어 내 머리칼을 빗고, 숨죽여 백까지 세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빗질을 멈추고는 느슨하게 땋아준다. 그날 밤 나는 금방 잠들고, 잠에서 깼을 때 예전에 겪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44p


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공기에서 뭔가 더 어두운 것, 갑자기 들이닥쳐서 전부 바꿔놓을 무언가의 맛이 난다. -57p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70p


"아무 일도 없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가 묻고 있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만큼 충분히 배웠고, 충분히 자랐다. 입을 다물기 딱 좋은 기회다. -96p



화자는 손이 가지 않는 아이라는 칭찬이 어색하다. 본가에서 당연했던 처세가 맡겨진 공간에서 미덕으로 인정받는다. 그녀는 그 맛을 알기에 다시 무미건조한 인간 인테리어로 살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여백이 많은 만큼 여운이 길어서 오래오래 되새길만한 작품을 쓰는 클레어 키건은 이번에도 간결하게 압축해버린 단편으로 돌아왔다. 반 년 만에 최상급중고로 만난 <맡겨진 소녀>에 이어 그녀의 신간과 유리문진을 미리 사두었다. 2023년에 만난 작가 목록의 완성도가 한층 더 발돋움한 것 같다.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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