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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May 19. 2024

마침내 슬픔이 그를 따라잡았다

에르난 디아스 데뷔작 <먼 곳에서>

도서제공리뷰



 3세계가  1세계에 고유의 것을 하라고 요구하는 경우는 없다. 스웨덴 사람에게 바이킹 복장을 하고 시상식에 나오라거나 하는....-정지돈,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61p



과학과 철학의 근본적 질문으로 촘촘하게 엮어가는 어느 스웨덴 소년, 아니 국제미아의 미국횡단기는 리뷰어들이 코맥 매카시나 허클베리 핀을 외치게 했다. 이들의 이름은 알지만 읽어본  없는 나는 소설이 끝나고서야 춘희를 생각했다.


<고래> 춘희, 끝없는 혼자만의 작업으로 장인이 되어버린 벽돌공 춘희,  년의 고독 중에서  이상을 떠맡고도 공백으로 자리했던 춘희.




<트러스트> 한국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에르난 디아스의 < 곳에서> 철학박사인 그가 44세에 발표하자마자 단숨에 미국 문단을 사로잡은 데뷔작. 사유와 항해와 미국 로드트립이라면 사족을  쓰는 내게도 마력을 발휘하며 다가왔다. 게다가  섬세한 번역은 다름 아닌 <워터댄서> 역자 강동혁 선생님의 작품이다.




삐삐 혹은 리스베트(스밀라)와 춘희가 연상되는 이 고독한 소년은 평생 성장하는 거구의 남자, 지키지 못한 소녀의 살인 누명으로 타락한 전설이 되어버린 거인, 사자 후드를 쓴 괴물이다.


그가 길 위에서 배우고 익힌 과학과 의술과 가죽공예와 사랑은 나머지 우리가 늘어놓고 흥정하는 나머지 모든 것들을 무색하게 한다. 깊이감 있는 미국소설이라면 그러하듯 전반부는 공부하듯 읽어야 하지만 핑고와 헬렌과 에이서를 통해 반복되는 그의 시련은 고통스러운 페이지터너였다. 그의 상실이 희석될 세월까지 따라잡으려면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아주 길다고 할 수 없지만 실제 분량보다는 충분히 영겁으로 느껴지는 세월을 지나 마침내 중년과 노년 사이의 어느 쯤에 와 있는 그를 본다.




​그들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뉴욕이었다. 아메리카에서 둘 다 이름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뉴욕이라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30p


​침대에서, 아픔을 느끼며, 혼자 있자니 기분이 좋았다. 리누스를 잃은 이후로 경험해온 대단히 깊은 슬픔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도 좋았다. 그는 슬픔과 편안함을 구분할 수 없었다. -50p


신은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다.

신은 인간이  무언가를 창조했다. -91p


로리머는 이민자 행렬이란 쭉 늘어나 가늘게 기어가는 선이 된 거대한 도시라고 했었다. 그 말이 맞았다. -152p


헬렌은 실제로 그 이름을 발음하려고 노력한, 아메리카의 몇 안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177p


마침내 슬픔이 그를 따라잡았다.

그는 절대 다른 사람들을 마주볼  없을 것이다. 한번 , 혼자서,   공간에  있는 지금은 확실히   있었다. -216p


죽음이라는 선물이 주어지자 호칸은 중독된 근육을 마지막 하나까지 사용해  선물을 밀어냈다.

-222p


하지만 세상이 돌아왔다. 에이서가 의미와 목적으로 찰랑거리는 세상을 다시 가져다주었다. -267p


그는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았다.

그냥 더이상 디딜 발걸음이 없었다. -284p


"걸었다." 호칸은 질문의 마지막 부분에만 대답했다. -304p




책을 '단숨에 읽었다' 리뷰나 추천사를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그럴 집중력이 내게는 없다. 그럼에도 어느 구간에서만큼은 '단숨에 읽게'되는 <백년의 고독> <고래> 잇는 작품이 바로 에르난 디아스의 < 곳에서>.  계보에도 치명적 오류가 있다. 디아스는 그를 은유하는  어떤 작가보다 깊은 곳을 섬세하게 건드리지만 누군가를 불쾌하게 하지 않고도 재미를 선사한다. 필력도 최고였지만 그의 생애에 새겨진 경험과 사유가 더욱 탐나는 작가다.



(문학동네에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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