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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Mar 04. 2024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겉으로 드러난 것은 보잘 것 없지만, 화려하거나 열렬하거나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클 수 있다는 것을, 클레어 키건의 조용한 글이 낮은 소리로 들려준다. 춥고 어두운 겨울밤에 따스한 슬픔의 불빛이, 켜진다. -131p, 옮긴이의 글(홍한별)




작년 도서전에서 발견한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를 12월에 와서야 중고서점 찬스로 만나 거의 연말에 읽었다. 그 사이 진짜 크리스마스 소설인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입소문과 자발적 홍보를 타고 생소한 작가임에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여러 번의 새책 구입 찬스가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키건의 신간과 굿즈까지 득템했고, 크리스마스를 넘기지 않고 읽었지만 전작의 리뷰가 충분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도록 완독서를 잠시 쟁여두었다.

다작하지 않는(!) 클레어 키건의 이번 작품은 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른 (역대 후보작 중에서 가장 짧은) 소설이며 한국어판은 <밀크맨>과 <도시를 걷는 여자들>을 번역한 홍한별 작가님의 매직 터치를 거쳐 원서가 부럽지 않은 물성으로 나타났다. 원작은 킬리언 머피가 영화화를 하고 있다는데....




​이미 저자에게 반했기에 자세한 스펙을 알수록 오히려 신비감이 반감되는 듯? 그럼에도 믿고 보는 부커리스트, 믿고 보는 홍한별이니까.


<맡겨진 소녀>에서 증폭된 기대감을 안고서 설레는 마음으로 읽었다. <맡겨진 소녀>와 <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이 명백하게 다른 계절을 묘사하고 있음에도 충분히 과몰입을 할 수 있었던 이번 겨울방학. 제 시즌에 읽은 신간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단어 하나하나가 소름 그 자체였다.


과연 십 년에 한 번 중편 같은 단편을 발표하는 작가의 소설이란, 거의 산문시에 가깝다. 이번주에는 시작(詩作)에 관한 꼭지를 연재해야 하는데 오늘의 리뷰가 약간의 용기를 보탤 수 있기를.


키건의 문장은 말할 수 없거나 말하면 안 되는 것들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동시에 그 평범하고 사소한 단어의 조합을 단순하게 똑 떼어 놓아도 가슴이 저미도록 아름답게 울린다. 다른 언어로도 이처럼 사소한 진동을 느낄 수 있다니! 역자의 고뇌와 경지가 느껴지는 포인트이기도 하다.




천천히 원을 그리며 반죽하듯, 원심력과 구심력을 활용한 듯한 전개는 춥고 배고픈 계절의 이웃들과 그 민낯을 바라보게 한다.


비밀 아닌 비밀을 간직한, 조금은 세상에 빚진 느낌으로 살아가는 존재들. 그 부족함을 착취하는 위선자와 방관자들. 한마디 비난 없이 그 모든 것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그럼에도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을 지나 '어떻게든 해 나가리라.'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29p


​이 일요일 밤에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심란한 걸까? -35p


뭔가 작지만 단단한 것이 목구멍에 맺혔고 애를 써보았지만 그걸 말로 꺼낼 수도 삼킬 수도 없었다.

-56p


​삶에서 그토록 많은 부분이 운에 따라 결정된다는게 그럴 만하면서도 동시에 심히 부당하게 느껴졌다.

-64p


​우리 어머니도 딸이었죠. 감히 말씀드리지만 원장님도, 또 원장님 식구, 제 식구들도 전부 마찬가지고요. -77p


방이 사방에서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뜻 모를 무늬가 반복되는 벽지가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91p


늘 그러듯 크리스마스는 사람들한테서 가장 좋은 면과 가장 나쁜 면 둘 다를 끌어냈다. -103p


미시즈 케호는 말을 멈추고는 극도로 현실적인 여자가 가끔 남자들을 볼 때 짓는 표정, 철없는 어린애 보듯 하는 표정을 지었다. -106p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111p


​가슴속에 설렘과 함께, 아직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맞닥뜨릴 것이 분명한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 솟았다. -118p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120p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 리뷰를 이어서 업로드할 예정이며, 연재 에세이의 해당 파트는 1월 초에 게시 완료했습니다. 연재 에세이 <책수집가 산책언니의 독서테라피>는 작품목록에 있습니다.


인스타그램 @killzzang에서 이 서평을 포함하여 아직 올라오지 않은 지난 서평과 창작소설의 초고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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