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필이라니, 그건 좀

​추석 연휴를 앞두고 극장 직원들 사이에는 약간의 신경전이 벌어졌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지 않는 이상 연휴에도 원래 담당하는 요일에 출근해야 하는데 수당이 포함된 추가 근무를 하고 싶은 사람과 해야 하는 사람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복선은 연휴를 끼고 원래 퇴근하고 쉬는 시간을 활용해 자료 조사를 하고 본격적으로 블로그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복선이 출근하는 평일이 추석 연휴 기간이라 상영 시간표가 추가되면서 네 시간 정도 추가 근무를 해야 했다. 다른 직원이 대신 나와도 된다. 강유는 일하는 요일이 같고, 출퇴근 시간이 달랐었는데 연휴 기간에는 둘 다 점심부터 심야까지 근무해야 했다.


​우성은 주말 오전부터 낮까지 일하고 저녁 담당자들이 따로 있으니 추가근무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복선이 추가로 근무해야 하는 시간을 우성에게 부탁해도 되지만 그럴 경우 우성과 강유가 함께 일한다. 어쩐지 내 욕을 하라고 자리를 깔아주는 느낌이 들어 등뒤가 싸늘해졌다. 그건 좀 아닌 듯. 복선이 입사하기 전에는 우성이 평일에 일했는데, 점점 프리랜서 일이 많아져서 주말로 재취업을 했다. 그렇게 우성의 빈자리로 복선이 들어와서 원래 친했던 우성과 강유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셈이다. 강유의 관심을 더 받으려는 심리전과 함께 두 동생의 묘한 경쟁심은 강유만 알고 있었다.




우성은 대학교 입학과 함께 서울살이를 시작해서 생존을 걸고 치밀하게 페르소나를 가꾸었다. 인스타그램으로 요약되는 온라인 정체성은 오히려 그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다. 극작과를 다니다가, 대학로 이곳저곳에서 조금씩 일을 하다가 겨우 졸업만 하고 몇 년 뒤 의류회사에 취업했다가 다시 몇 년 뒤 퇴사하고 파트타이머와 프리랜서를 병행했다. 그녀는 연극인이라고 하기엔 깊이가 얕은데 당연히 영화인은 아니었다. 취미로 영화를 보다가, 영화 리뷰를 주력으로 하는 블로거-인스타그래머가 되었을 뿐이다. 영화 또는 책을 취미로 리뷰하는 수많은 계정 중의 하나로써 비슷한 계정들과 영감을 주고받되 치열하게 경쟁하고 싶지 않다.


영화평론가까지는 넘볼 수도 없지만 아마추어 영화덕후 중에도 영화 취향이 세련된 사람들이 있다. 특정 시대(혹은 그냥 옛날)의 특정 분야만 전문으로 다루는 사람도 있는데 이들은 (아날로그 세대가 많다 보니) 종종 동시대 온라인 플랫폼과 불화한다. 한편 지금은 영화계나 문학계의 자생력 같은 것들이 혼란스러운데, 일명 블록버스터가 아닌 작품들 위주로 감상하되 감상에 대한 식견이 풍부하거나 철학적인 분석을 잘 해내는 사람도 있다. 당장 복선만 해도 작품목록이 길지는 않아도 자기만의 취향과 철학이 확고한 편이다. 우성이 오히려 잡식성이다. 그래서 우성은 복선이 자기 스타일대로 승승장구하는 것을 격려하면서 지켜보고 싶은 마음과 자신이 의문의 패배감을 느낄까 우려되는 마음속에서 어지러웠다.




복선은 부유한 동네 언저리에 살면서 부유한 동네 사람들과 철저하게 분리된 채 막연히 패배감을 느끼며 살아왔다. 몇 안 되는 복선의 가족과 일가친척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과시하고 싶어 했지만 그게 무언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복선의 혈육들은 명품이나 이미테이션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그렇다고 독창적이면서 시대를 앞서가는 디자인을 알아보는 안목도 없었다. 그렇기에 만들어진 앤티크나 밋밋한 모던라이프에 만족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과감한 스타일링을 하자니 자신이 없고, 처바를 돈도 없는데, 만약 있다 해도 그걸 천박하게 티 내고 싶지는 않은 정도?


우성이나 강유는 백화점, 그런데 안타깝게도 별로 비싸지 않은(!) 백화점의 마네킹처럼 차려입은 복선을 보고 깜짝 놀랄 때가 있었다. 우성과 강유는 함께한 시간이 오래되진 않았어도 각각의 독특함을 추구하는 점에 서로 매력을 느껴왔기 때문에 유난히 복선의 미적 감각이 거슬리는 날에는 둘만의 시그널을 주고받으며 말수를 줄여왔다.


“언니, 근데 시네필이 아니어도 막 드라마 리뷰 같은 거 해도 돼?”

​”시네필의 정의가 뭔데?“

”영화 좋아하는 사람 아냐? 영화덕후? 언니처럼.“


​대학원 영어를 탈탈 털고 프랑스어랑 라틴어로 넘어갔다더니, 복선이 주워오는 어휘들은 예술가가 아닌 예술 전공한 예술계 언저리의 잉여인간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나 시네필 아니야. 자기 입으로 시네필이라고 말하려면 칸 영화제는 못하도 전주랑 부산까지는 다녀줘야 할걸? 그게 무슨 기준은 아닌데, 무튼 난 아님.“

”언니도 영화제 많이 가지 않았었나?“

”서울에서 하는 영화제 스텝을 2년 정도 한 적은 있지. 해마다 챙기는 영화제는 없어. 그냥 매년 다른 영화제 하루이틀 기웃거리는 정도야.“


영화덕후들이 스스로를 혹은 서로를 어디까지 인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도 책도 알면 알수록 알아야 할 게 너무 많아서 아는 척하기가 두려워질 때가 많다. 우성은 이제 감정에 충실하지도 못하지만 그렇다고 영화이론이나 관련된 철학자들을 꿰고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관련 콘텐츠나 감독의 다른 작품, 원작소설 혹은 배우의 필모그래피 정도를 조금씩 언급할 뿐이다. 아주 보통의 관객이라기엔 살짝 억울하고, 그럼에도 영화인 혹은 영화계 주변인들에게 느껴지는 어떤 아우라를 그저 범접할 수 없다고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복선이 너는 배우였다며?“

”거의 아역이지 뭐. 의미없어.“

”내 리뷰 참고해도 되고, 너는 그냥 너 마음대로 써.“

”응. 그래야겠어. 어차피 난 거의 막장드라마 위주로 쓸 거 같더라고. 어쩌면 조회수는 나올지도.“


강유는 둘의 대화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복선은 우성에게 의지하고 싶은 한편 우성의 예술적 아우라에 조금 기죽어 있었다. 반면 우성은 복선의 나름 방대한 레퍼런스를 의식하며 티칭보다는 가이드 역할에만 충실하려는 조심성을 보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너지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기질이 너무 달랐다.


복선은 결국 연휴 근무를 제안하지 못했다. 자신이 우성과 함께 일하는 거라면 모를까, 자신의 추가 근무를 넘겨서 우성과 강유가 함께 일하는 건 못 견디게 질투가 났다. 그래봐야 우성과 강유의 역사나 앞으로의 시간들에 별 영향을 주진 않겠지만 복선 자신의 제안으로 두 사람만의 시간을 만들어주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그래, 마음 불편하게 내 시간을 갖느니 그냥 강유 언니와 일하는 게 낫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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