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이베카, 웨스트 빌리지, 소호, 월스트리트
뉴요커의 빨리걷기와 관광객의 랜드마크 욕망을 다 가질 수 있다. 산책덕후 한국언니는 성격이 급하지만 통제광은 아니라서 종종 느긋해 보인다는 오해를 산다. 갈수록 정말로 느긋해지기도 해서 적당히 통제를 당하는 것도 즐기는 경지에 올랐지만, 왜 혼자 여행을 하겠나.
내가 통제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을 통제하고 싶지 않아서 느슨해도 유지되는 관계들만 계속 느슨하게 유지하는 중이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남에게 통제당하고 싶지 않은 정도가 남을 통제하고 싶지 않은 정도의 100배는 된다. 자유를 기브 앤 테이크하겠다는 마음이라기보다는 내가 싫으니까 너에게도 안 하겠다는 배려인데, 증명할 방법이 없다.
뉴요커처럼 빨리걷기를 하면서 관광객처럼 랜드마크를 접수하는, 홍길동 모드는 정해진 곳 도장깨기가 아니다. 일단 맨해튼에 발을 들여놓으면 인파에 휩쓸리고, 허파는 가까운 공원을 마킹하라고 끊임없이 외친다. 게다가 거의 모든 교차로에서 시선강탈을 하는 곳으로 방향을 틀 준비가 되어있다.
변수가 너무 많다. 그런데 동행이 있으면 주변을 보지 못한다. 그 사람에게 주의력을 올인한다. 동행이 내 주의력을 독점한 기분을 항상 느끼진 않을 것이다. 실제로는 누군가와 함께 있는 나 자신, 또는 뉴욕에 있는 나 자신에게 올인하고 있었을 테니.
(다들 그렇지 않나요?)
뉴욕에 도착했던 날, 친구와 함께 갔던 일식당과 벙커 술집도 로어 맨해튼이었다. 현지인과 있는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나의 내비게이터는 알차게 휴식을 취했고, 나는 거기가 어딘지 모른다.
아이폰은 안다. 사진첩 맵투어를 통해 알아냈다. 우리가 3년 전에 갔던 술집은, 우리가 6년 전에 지나갔던 블루노트에서 2.5블록 거리다.
뉴욕대(NYU)와 웨스트 빌리지 사이. 이미 추억 속에 살고 있지만, 추억 돋네. 이 구역이 뉴욕의 피자 거리라는 소문도 있다. 희귀템인 화덕피자를 바로 이 근처에서 먹어봤기 때문에 인정. 대체 리틀 이탈리에는 뭐가 있는 거지?
리틀 이탈리도 자주 가는 곳이었다. 첫 여행 때 핼러윈 무드에 정들었던 곳이고, 정작 소호라는 곳의 느낌을 잘 모르겠어서 자꾸 소호를 찾아갔다. 가다 보면 리틀 이탈리도 계속 스치게 된다.
하이라인에서 유니언 스퀘어까지 산책하던 날도 소호에 들렀다. 소호랑 무관한 SPA 브랜드의 거대한 매장을 뒤져 선글라스를 구입했다. 그 선글라스를 다음 날 브루클린 스냅 촬영을 할 때도 착용했고, 3년 뒤인 2022년 9월의 가평에서도 착용했다.
스냅 촬영을 하는 날 점심에도 소호에 갔다. 숙소와 촬영지는 브루클린이었지만 최적 경로는 맨해튼에서 환승하는 것. 그 환승 타임에 피자 브런치를 즐겼다. 교통카드 7일권을 충전하면 역세권의 스탑오버를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다. 특히 뉴욕에서는 6박 7일을 기준으로 날짜를 가감하는 것을 추천한다.
맨해튼 리틀 이탈리 근처의 피자리아 이름은 브루클린 핫플인 '윌리엄스버그' 피자였다. 그리웠던 뉴욕 페퍼로니 맛! 그동안 남미 음식과 편의점 도시락(원래는 이런 것도 좋아한다.) 사이에서 방황하다 가끔 일식으로 겨우 해장했던 서러움이 조금 풀렸다. 스냅 촬영이 끝나고 가야 할 곳도 맨해튼이었다. 왔던 길을 돌아가야 할 테니, 이번에야말로 스탑오버를 제대로 즐겨야지.
촬영은 공식적으로 1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웨딩촬영과 같은 규모라서 다른 일정은 부수적이었다. 이쯤이면 왜 홍길동 모드가 도장깨기가 아니고 도장깨기일 수 없는지 설명이 되려나. 촬영이 무사히 끝나고 그 순간을 어디서 즐기고 싶을지는 그 순간이 되어봐야 할 수 있기에, 미리 정하지 않았다.
트라이베카에 갔다. 사라베스 테라스에서 게살 (시금치 듬뿍) 파스타와 달달해서 날벌레를 불러들이는 칵테일을 먹으면서 One World Trade Center의 일몰을 감상했다. Nice job!
하지만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왜 '원' 월드*가 됐는지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니 부끄럽구만. 이 구역의 리뷰를 지금 쓰지 않았다면 끝내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여기엔 첫 여행에서 놓친 것이 정말 유감인 장소가 있다. 그라운드 제로는 쌍둥이 빌딩이 있던 자리에 마련된 추모공간이다. 이곳에 적힌 이름들을 만져봤다. 뉴요커라면, 이 의식을 스킵하지 않기를.
* 원 월드는 잃어버린 쌍둥이를 새로 지을 때 하나가 되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이틀 후 로어 맨해튼을 다시 찾았다. 센트럴파크의 여세를 몰아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서 인스타그램 프로필이 된 인생샷을 얻었고, 이어서 월스트리트를 빠르게 접수했다. 이 날씨, 이 햇살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다시 너를 볼 수 있을까?
낮에 보는 월스트리트는 처음이자 마지막인데 황소는 웨이팅이 길어서 패스했다. 황소는 됐고, 원래 보고 싶었던 용감한 소녀를 찾았는데 소녀도 바빴고 나도 바빴다. 밤이 내리기 전 해가 지는 동안 법원과 시청을 알차게 돌아보고 부서진 캐리어 대신 새것을 사러 가야 했다. 뉴욕에선 항상 캐리어를 사게 된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