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에 충실했던 까칠한 뉴요커의 시그니처
뉴욕을 상징하는 호퍼의 작품은 뉴욕과 애증의 관계인 뉴요커 또는 워너비 뉴요커의 심중을 파고든다. 그의 뉴욕스러운 그림을 휴대폰으로만 들여다봐도 뉴욕에 두고 온 영혼이 나의 물리적 동선과 함께하는 영혼을 죄다 불러모으는 느낌이다.
호퍼를 보기 위해 다시 미국에 간 것은 아니었지만, 가능하면 그의 작품을 많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마음도 그저 잠재적으로 존재했을 뿐이다. 좀더 치밀하게 알아봤다면 나는 휘트니 뮤지엄에 갔어야 했다. 대신, 그의 가장 대표적인 뉴욕 그림을 시카고에서 봤다. 미국에 도착하고 16시간쯤 됐었나?
시카고 미술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조르주 쇠라의 <그링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도 있다. 그러나 들어가자마자 엄숙해지는 공간이 있다면 바로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앞이다. 쇠라 앞에서는 '우와, 우와!' 할 것 같은 사람들도 호퍼 앞에서는 '헉.' 하게 된다.
Nighthawksㅣ시카고 미술관, 시카고
이 작품은 가장 유명하기도 하지만, 호퍼 작풍의 집약체이다. 이 그림의 의미와 그림 뒤의 의미에 대한 집약체는 뉴욕과 고독의 예술사를 깊이있게 통찰한 올리비아 랭의 책, <외로운 도시>에서도 볼 수 있다. 에드워드는 아내의 재능을 흡수해서 성공했을까? 외로움에 집착했던 그는 컴플렉스를 표현함으로써 외로움을 잘 타는, 약점을 강점으로 승화시켰을까?
휘트니 미술관은 못갔으나 뉴욕에서 호퍼를 보긴 했다. 처음에는 인상파와 아시아관 위주로 감상했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2019년의 두번째 방문까지 포함해도 감상률 50%가 안 되지만, 적어도 이번에는 호퍼가 있던 20세기, 다시 르네상스 이후 근대 유럽의 수많은 전시실과 <마담 X>를 비롯해 호퍼의 스승들이 있는 아메리칸 윙에 집중했다.
물론 악기 특별전과 창고형(!) 전시실도 눈에 띈 이상 건너뛰지 않았다. 내가 공략한 첫번째 섹션에는 이렇다할 대표작은 없었지만 호퍼의 느낌은 충분했던 풍경화들이 있었다.
Tables for Ladiesㅣ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한 쌍의 커플이 잘 꾸머진 공간에서 식사를 한다. 웨이트리스는 창가의 과일 바구니를 잡은 채 몸을 숙이고 있다. 계산원은 자기 위치에서 할 일에 열중하고 있다. 이 두 여성의 분위기에서 도시 여성에게 새롭게 부여된 집 밖의 지위를 볼 수 있다.
<숙녀용 테이블>이라는 제목은 호퍼의 전작에서 매춘부로 짐작되는 혼밥 여성처럼 '새로운, 외출하는 여성 고객들'을 환영하는 의미의 슬로건을 통해 최근의 사회 변화를 암시한다. (미술관 네임보드)
다시 보니, 이 작품의 엽서(정확히는 '카드'와 봉투) 버전이 있었다. 혈기왕성했던 시카고 뮤지업샵에서 구입한 굿즈 중에 에드워드 호퍼 카드 세트가 있었고 이 안에는 '숙녀용 테이블', '찹 수이'를 포함한 4종의 그림이 인쇄된 카드가 각 2부씩 들어있었다.
From Williamsburg Bridge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뉴욕 연립 주택의 파사드의 윗부분만 다리 위로 드러나는 시티뷰이다. 호퍼 특유의 열린 창문으로 보이는 인물이 인상적이다. (2023년 서울시립미술관의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전시에 이 작품의 스케치와 <나이트호크>의 스케치가 걸려 있다.)
The Lighthouse at Two Lights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호퍼가 뉴욕을 피해 여름 휴가를 보내던 메인 주의 케이프 엘리자베스에 있는 등대라고 한다. 고독한 풍경화의 연장선인 한편 뉴욕보다는 교외나 시골이 훨씬 따스하게 느껴진다. 빛의 강도가 다르다.
호퍼의 그림에 영감을 받은 소설집 <빛 혹은 그림자>의 표지는 <케이프 코드의 아침>이라는 그림인데, 배경이 되는 케이프 코드는 메시추세츠 주의 보스턴 근처다. 이 그림을 소재로 단편을 쓰기로 한 소설가가 약속을 지키지 못해 '남은 그림'이 되었고, 엮은이와 편집자는 독자에게 이 '남은 그림'으로 단편을 써달라는 부탁을 서문에 남겼다. 해당 책에 수록된 그림을 포함한 서평에 내가 쓴 단편도 첨부했다.
뉴욕에 가기 전 호퍼의 다른 그림을 만났다. 이 작품은 내가 좋아하는 호퍼 느낌이다. 호퍼 특유의 빛과 그림자를 느낄 수 있다. 여행 사진을 분류하면서 아침의 빛과 저녁의 빛이 다르고, 특히 오전과 오후가 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호퍼의 그림에서 그 묘한 차이를 구별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호퍼는 그 차이를 그림에 담아내려고 했을 듯하다.
August in the City
노튼 미술관, 웨스트 팜 비치
이 장소는 센트럴파크나 맨해튼의 다른 공원 근처의 건물일까? 공원이 빛을 가리지 않아 바닥으로 강하게 내리쬐는 빛과 옆 블록의 고층 건물에 의해 강하게 지는 그림자가 대비된다. 창문 안의 실내가 엿보이는 것도 호퍼의 시그니처다.
콘크리트에 반사된, 웜그레이와 미색이 오묘하게 공존하는 '빛' 부분과 연한 올리브색에서 점차 심연으로 빨려들어가는 초록빛 '그림자' 부분의 대비가 호퍼의 시그니처 중 하나. 대표작 최다 출연자인 조 호퍼가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 단순 풍경화는 덜 쓸쓸하지만 <밤의 창문>과 같이 숨겨놓은 인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여백이 더 넓어진 셈이다.
https://brunch.co.kr/@swover/167
https://brunch.co.kr/@swover/141
https://brunch.co.kr/@swover/61
https://brunch.co.kr/@swover/41
호퍼의 스승으로 도시의 사실적 묘사를 강조한 로버트 헨라이와 존 싱어 사전트의 영향을 받은 윌리엄 메리트 체이스가 있다. 체이스의 대표작은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에도 있고, 워싱턴 국립미술관에도 있는데 모든 작품을 다 기록하지 못해서 미술관 홈페이지를 통해 입수한 그림의 사진을 참고해 그의 작풍을 가볍게 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