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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Apr 20. 2023

에드워드 호퍼를 사랑한 작가들

로런스 블록 외, <빛 혹은 그림자>

이 시대 최고의 화가의 그림에서
이 시대 최고의 작가들이 꺼낸 이야기를
이 한 권의 책에 담았다.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옮긴이의 말 중에서




베키의 아침


벌써 6시가 다 되어간다. 동생들을 데리고 기차를 타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 기차역에서 우버를 부르다가 휴대폰이 꺼졌다. 베키의 휴대폰은 아빠의 명의로 되어있고, 모든 결제수단이 등록되어있다. 다만 두 개의 은행 계좌로 연결된다. 책임자인 아빠가 일 년에 1000달러씩 입금하는 비상금 계좌, 아빠와 엄마가 한 달에 각 200달러씩 입금하는 어린이들 생활비. 그렇다고 베키가 모든 살림을 하는 건 아니다. 세계 여행 중인 엄마와 싱글 대디인 아빠를 위해 동생들과 본인을 데려다 주고 데리러 올때 드는 출장비용을 지출할 뿐이다. 아, 피자도.


배리의 휴대폰은 베키의 명의로 되어 있어서 어떤 신용카드와도 연결되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현금을 지불해야 하는데, 50달러짜리밖에 없었다. 초행길이라 택시비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베키도 어린이였기 때문에 거리를 금액으로 환산하지는 못했다.



케이프코드의 아침, 1950


택시가 도착한 곳은 끝없는 숲으로 둘러싸여 아늑하게 느껴지는 갈대밭...인 줄 알았는데 하얀 울타리가 있는 하얀 집이었다. 아빠와 세 남매가 사는 브루클린에서 D라인을 타고 34번가 펜실베니아역에 도착한 지 8시간 만에 오늘의 목적을 달성했다.


보스턴까지 이동하는 동안 지루해진 동생들의 다툼을 말려야 했다. 배리를 혼자 두는 것은 불안했다. 쉴새없이 꼼지락거리는 막내라도 붙여놔야 시선을 거둘 시간이 확보된다. 불안해서 책이나 영화를 볼 수는 없고, 그래봐야 음악을 들으면서 멍때리는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동생들을 지켜보는 틈틈이 다른 사람들과 창밖 풍경을 관찰하고 싶었다.


아침에 출발해 하루 종일을 달려 하교시간이 되었는데도 겨우 보스턴이었고, 마침내 케이프코드에 도착했을 때 휴대폰의 배터리가 방전됐다. 기차역부터 목적지까지 택시요금은 47달러. 거스름돈 걱정은 기우였다. 기사님은 1달러, 5달러, 10달러짜리가 각각 100장이 넘는 돈다발을 갖고 있었다.




하얀 집은 조용했다. 진입로는 누군가 방금 쓸고 지나간 것처럼 차분했고, 석양은 아직 충분했다. 여름의 시작이 고되었지만 바람이 불어 끝없는 숲이 흔들릴 때는 여기까지 달려온 보람을 느꼈다. 두 동생을 데리고 가장 멀리까지 온 것이다. 배리와 둘만 보스턴에 가 본 적은 있었지만 촐랑거리는 막내를 달고 셋이서, 보스턴도 아닌 케이프코드라니. 그것도 역에서 택시비 47달러가 나오는 외딴 집이라니. 엄마가 알려준 두 번째 화분 아래 두 번째 벽돌을 들어올리니 열쇠가 있었다.


출발할때 아침으로 샌드위치를 먹고 보스턴 역에서 점심 겸 저녁으로 또 샌드위치를 먹었다. 아빠가 끓여준 치킨 수프가 생각났지만, 엄마의 지시대로 찬장에서 토마토 수프 캔을 꺼내 한 컵씩만 나누어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뜨니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단편집에 참여하기로 한 작가가 작품을 쓰지 못해서 표지가 된 <케이프코드의 아침>은 이야기 없이 남은 그림이다. 편집자의 제안으로 엮은이는 이 그림을 독자에게 넘겼고, 호퍼였기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된 호퍼덕후지만 17년째 소설을 완성하지 못하고 기획만 하고 있는 나는 냉큼 그 기회를 잡는다.  


맨해튼 붙박이인 호퍼가 여름이면 뉴잉글랜드로 장기 휴가를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지난 호퍼 <미국 직관> 포스팅 참고-이 그림 역시 휴가 중, 당연히 조를 모델삼아 그린 것으로 보고 3년째 방치중인 기획서에 있던 한 장면을 그려봤다.


이 초단편 소설이 시리즈에 수록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호퍼의 뒷조사를 하기 전부터 브루클린의 베키가 여름 별장에서 엄마를 만나기로 한 장면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 별장이 사우스햄튼에서 케이프코드로 변경됐을 뿐. 이제 다른 작가들을 만나보자.



여름날의 저녁, 1947


프로비던스에 아파트와 직업과 남자친구가 있는데, 어쩌면 집에서 도망쳐나온 것 같기도 하네요. 3월이면 마흔이 되는데 아무래도 중년의 위기 같은 게 왔나봐요. -66p, 질 D. 블록, '캐럴라인 이야기'




바닷가 방, 1951



파비우스는 집을 가로질러 바다로 문이 난 방으로 뛰어가 신발을 벗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수영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었지만 그녀가 가라앉기 전에 물살을 거슬러 그 거리를 따라잡는 것은 무리였다. 그는 옆으로 헤엄을 치면서 문턱 너머로 그녀를 방안으로 밀어넣은 다음, 자기는 짧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121p, 니컬러스 크리스토퍼, '바닷가 방'


뉴욕 영화, 1939


아마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스토브에 화상을 입은 건 내가 그럴 만한 짓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그 주위에 많았다. 아버지 말이 곧 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229p, 조 R. 랜스데일, '영사기사'



밤의 사무실, 1940


어떤 느낌이었냐고? 마치 그녀 자신의 세번째 복사본 같은 기분이었다. 식별은 가능하지만 흐릿하고, 약간 얼룩진 복사본. 보관용 사본으로는 쓸모가 있지만 고객들에게 보낼 수는 없는 것.

-281p, 워런 무어, '밤의 사무실'



오전 열한시, 1926


그가 알면 어쩌지. 서른아홉인데.

그게 작년이었다. 다음번 생일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310p, 조이스 캐럴 오츠, '창가의 여자'



호텔방, 1931


다른 승객들을 따라 문을 나서, 계단을 내려가 승강장에 내려서는 순간, 그녀는 주변에 있던 다른 시골뜨기들과 똑같은 행동을 했다-위를 올려다보았다.

-334p, 크리스 넬스콧, '정물화 1931'


그러는 대신, 그녀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세상의 질병을ㅡ그녀가 사는 세상의 질병을ㅡ관찰했고, '도울 수 있는' 특권을 이용했다. 어쩌면 그저 관음증 환자처럼, 다른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351p, 크리스 넬스콧, '정물화 1931'



자동판매기 식당, 1927


대비를 즐길 줄 알아야 해, 리프헨.

씁쓸한 것과 달콤한 것.

한 가지 맛이 다른 맛을 더 강하게 하거든.

이 세상이 그렇듯이 테이블에서도 그래.

-420p, 로런스 블록, 자동판매기 식당의 가을




추천 작품


<빛 혹은 그림자>에 수록된 작품 중에서 강력추천하는 작품은 크리스 넬스콧의 <정물화 1931>이다. 호퍼가 스릴러와 찰떡이고 그래서 나도, 이다혜 작가도, 스티븐 킹도 호퍼 못잃어병에 걸렸지만 이번 책에서 가장 품격있으면서도 스릴러의 본분에 충실한 작품은 단연 넬스콧-크리스틴 캐스린 러시의 필명-이다. 스릴러는 좋지만 호퍼를 덕질할 정도는 아니-라면 여기까지 안 읽으셨겠지만-신 분은 이 작가를 따로 챙겨보시길.


그 다음 추천작은 워런 무어의 <밤의 사무실>이다. 얼마전에 리뷰한 <블라이 저택의 유령>이 떠오르는데 뉴욕에 집착하는 미국 시골쥐, 또는 자기가 뉴요커인줄 아는 한국언니-저요-라면 과몰입 가능. 그리고 니컬러스 크리스토퍼의 <바닷가 방>을 창조한 동명의 그림은 호퍼 입덕작으로 유명한 듯 하다. 내게 이 책을 소개해준 권호영/에린 작가-브런치에서 에린 검색-도 이 그림으로 호퍼를 좋아하게 됐다는데. 역시 얼마전에 리뷰한 <해저도시 타코야키>가 떠오르는-실제로는 <바닷가 방>을 먼저 읽음-작품이다.


히치콕을 좋아하신다면 조너선 샌틀로퍼의 <밤의 창문>과 올리비아 랭의 <외로운 도시>를 교차대조하면 재미있을 것이다. 스릴러 덕후가 보기에는 <밤의 창문>이 좀 식상했다. 비슷한 엄빠문제가 등장하는 조 R. 랜스데일의 <영사기사>가 훨씬 좋음. <가십걸>이 떠오르는 <캐럴라인 이야기>와 요 네스뵈가 떠오르는 <밤을 새우는 사람들>도 추천한다.   





미국 직관, 관련 책 리뷰



미국 미술관의 에드워드 호퍼

https://brunch.co.kr/@swover/51   ​


올리비아 랭, <외로운 도시> 리뷰

https://brunch.co.kr/@swover/57  ​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전시 장소ㅣ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기간ㅣ 2023년 4월 20일-8월 20일

전시 예매처

https://mobileticket.interpark.com/goods/23004076?app_tapbar_state


실시간 전시 리뷰 예고편


기다려온 에드워드 호퍼 전시의 개막일이다. 얼리버드 오픈 첫 날 이미 매진된 시간이 많아서, 나의 입장 시간은 약 2주 후. 그 사이에 라울 뒤피 전시 중 하나도 개막을 하기에 뒤피 미리보기 포스팅을 급하게 준비하게 됐다. 원래는 이렇게까지 급할 이유가 없지만 이 포스팅을 하면서 뒤피까지 조사하면 좋을 것 같았다. 덩달아 <빛 혹은 그림자> 소설집을 완독하지도 않은 채로 <외로운 도시>의 호퍼 파트를 사라락 넘겨보면서 인덱스를 재구성했다.


요약하자면 77년생 뒤피가 마티스와 함께 포텐을 터뜨렸던 1905년에, 기존 화풍을 벗어나 밝고 발랄한 점묘화를 시도하던 69년생 마티스 역시 본격적으로 폴 세잔 스타일에 심취한다. 뒤피의 친구이기도 한 82년생 브라크는 이들의 스타일을 거쳐 81년생 피카소와 함께 큐비즘을 도입한다.


다음해인 1906년 폴 세잔이 사망하고 에드워드 호퍼가 파리에 여행을 오는데 82년생 호퍼는 유럽의 풍경을 사랑했지만 파리의 핫한 화가들과 교류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외로운 도시'를 품게 된 것 같기도 하다. 호퍼가 말하길, 본인은 미국의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를 그린 것이라며.


보다 자세한 인물관계도는 곧 등장할 '라울 뒤피' 사전 포스팅과 에드워드 호퍼 및 라울 뒤피 내한전시 리뷰를 참고. 호퍼, 브라크가 1882년생인데 300년 전 선배들까지 뒷조사하다가 뒷목 잡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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