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제임스 <보스턴 사람들>
두 주인공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인물이 버리나를 자원 삼고 매력을 채굴하기 위한 주목 경제에 뛰어들어 각자의 이해관계에 복무한다. 제임스는 이렇게 부박하고 천박한 세태를 당대 저널리즘의 생리로 집약하여 통렬하게 비판한다. 신문에 나는 것, 단 한 번 나는 것이 아니라 신문에 나는 사람으로 사는 것, 유명세가 곧 정체성이 되는 것, 통탄스럽게도 여기서 시대정신을 읽을 수밖에 없다면, 여기까지 오느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믿으면서) 치를 모든 피땀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709p, 해설_“과거를 현재의 빛으로 읽는 순간”: 페미니즘과 그 적들, 그리고 퀴어 사람의 가능성(조선정)
셀럽으로 타고난 사람들이 있다. 여기 그녀가 있다. 수상한 부모와 함께 등장했으나 페미니즘 태동기를 사로잡은 동시에 남성들의 시선도 사로잡은 그녀가. 열혈 여성해방전사인 올리브는 부모를 매수해 그녀를 구한다. 그녀 자신은 매력과 재능으로 지식인 남성을 설득하고 싶다. 올리브의 친척이자 천적인 베이질은 그녀에게 반했고, 그녀가 올리브나 대의에 이용당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봐야 그 매력을 독식하고 싶어하는 그저그런 남자였다.
그녀, 버리나 입장에서 올리브는 고맙지만 두려운 존재이며 베이질을 설득시키지 못하는 자신에게 실망한 이후로 이 모든 의무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뛰어난 연설가라고 해도 자기 사람 하나 설득하지 못한다면 어디서 걸려 넘어지든 언젠가는 넘어질 운명이라고 느꼈을지 모른다.
사랑에 맹목적일 때 여자친구들과 뼈 때리는 충고를 주고받던 시절이 있었다. (들을 땐 참 짜증난다.) 하지만 서른다섯이 훌쩍 넘어서야 출산으로 뛰어들기 시작한 그녀들에게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그나저나 방금 로봇오빠 부부가 득녀하는 장면을 봤다?) 얼마전에 육아휴직이 끝난 유진(가명)은 예나 지금이나 나의 관심병에 관심이 있다. (우리 관계의 고질적 대립점 중 하나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약점은 버리나처럼 (사랑하니까 바꾸고 싶은 남자를) 설득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설득을 해야하는 남자라면 상종할 가치를 못 느끼는 것이다. (라고 하면 약점이 아닌가?)
버리나는 이 시험을 통해 자신이 여성운동에 투신하기엔 모자라다고 여긴 듯하다. (사실 이건 올리브를 포함한 일부 여성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베이질에게 1도 매력을 못 느끼는 나로서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행태를 보인다. 그러나 베이질의 섬세한 억측(?)도 설득력이 있다. 올리브는 완고하다. 나는 자신이 남자 경험이 (별로) 없어서 수녀처럼 구는 여성들에게서 자주 기만을 읽는다. (덕분에 요즘 핫한 가톨릭 여성 스릴러에서 쾌감을 읽는다.) 현실에서는 (올리브 같은) 비혼여성보다, 자기는 출산할 거 다 했으면서 자식들이 열여섯, 스물, 서른이 되도록 모자상에 나오는 아기나 천사처럼 순결하기 바라는 기혼여성이 그런 경우가 많다. (언젠가 그 이야기를 헨리 제임스처럼 할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노처녀에 대한 오해를 확대재생산했다는 오해를 감수할만큼 헨리 제임스에게 이 책을 쓰게 한 원동력이 무엇일지 궁금하다.
동네 젊은 여자들을 상대로 조사해보니 항상 이런 뻔뻔한 남자 애인이 그녀(올리브)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때문에 그녀는 어느새 그런 남자를 극도로 미워하게 되었다. 그런 남자의 희생양이 되는 여자들이 그들 없이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그녀와 함께 있을 때 어떤 대화를 나누든 자기들끼리 있으면 자나 깨나 그런 남자 얘기뿐이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았다)는 걸 생각하면 그녀는 화가 치밀었다. -57p
당신은 안전해야 해요, 버리나-안전해야 해요. 하지만 당신 행동의 자유를 속박함으로써 그 안전을 얻어서는 안 돼요. -217p
그녀 입장에서는 그런 사실을 몰라도 상관없었는데, 그 남자는 그녀의 마음에 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보스턴 사람들은 상대가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생각도 못했다. -315p
본문만 700페이지인 이 책은 빠르게 넘어가기엔 묵직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다음 장을 계속 궁금하게 하는 장편소설의 미덕에 충실하다. 원작은 콤팩트한, (아직 완독 전인) <나사의 회전> 드라마 버전 <블라이 저택의 유령>으로 미국 작가 헨리 제임스를 만나, <보스턴 사람들>까지 펀딩한 덕분에 그의 수다스러움과 긴 시간 동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