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나는 여름을 사랑하게 된다
여름밤, 우리는 종로5가로 가는 버스 안에 있었다. 나는 최근에 읽은 시집 얘기를 했고 너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너는 시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내가 시 이야기를 할 때의 살짝 조심스러워지는 목소리, 말투와 평소보다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는 모습을 좋아한다. 가만히 듣고 있던 네가 여름 밤 속에서 나지막이 말한다. '여름은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어요.' 그 순간, 나는 여름을 사랑하게 된다.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사실 네가 했던 말은 '여러분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어요.'라는 걸 알게 되지만, 나는 그냥 여름은 누구나 시를 쓰게 되었다고 믿어버린다. 때로는 누군가와 오해를 풀면, 오해마저 풀어버리면,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정말로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나는 오해를 더 단단하고 예쁘게 매듭지어 벽에 장식처럼 주렁주렁 걸어놓고 그것을 바라보는 상상을 한다.
오해 너머의 네 모습은 구슬 주렴 뒤에 가려져 있다. 길게 드리워진 발 사이로 아른거리는 게 내가 진짜 보고 싶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구슬은 여러 각도에서 물살 같은 빛을 뿜는다. 가끔은 그 빛이 너무 환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게 된다. 구슬은 자기들끼리 부딪혀서 맑은 소리를 낸다. 때로는 그 소리를 듣고 싶어서 조용히 귀 기울이다가, 그 구슬 하나 하나를 내가 귀히 지닌 오해라고 생각하면 아름답고 쓸쓸한 기분이 든다.
예전에, 내가 좋아하던 언니가 내게 그랬다. 사람들은 누구나 태어나서, 단 한 번이라도 시를 쓰게 된다고. 자기가 쓰는 게 시인 줄 모르면서. 그래서 나는 계속 함부로 오해하고 쉽게 믿어버린다. 어떤 계절에만, 그 여름에만 쓰일 수 있던 시가 분명 있었다고. 아닌 줄 알면서도 믿어버렸던 연약한 마음과 눈부신 빛에 휩싸여 아무 것도 보지 못했던 그 여름이, 돌이켜보면 시인 줄도 모르면서 썼던 시였고 사랑인줄도 모르면서 해버린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