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윤 Apr 05. 2021

회복하는 인간

나는 나아가고 있다

회복하는 인간

*자살 시도에 관한 내용이 있으니 트리거 있으신 분들은 주의해주세요.

경찰은 내 신원을 확인해야 수사를 종료하고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지금 가족들이 모두 잠들었으니, 우리 집 말고 동네 초등학교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요새 젊은 사람들 힘든 일이 참 많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야기는 들어줄 수 있어요. 형사들은 이런 사람을 하루에 몇 명이나 볼까. 그러나 그 의례적인 말투에 이상하게 마음이 무너졌다. 이야기는 들어줄 수 있어요. 누군가의 이야기를 말없이 들어주는 일이 얼마나 힘든 세상이 되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나는 간단히 이름만 말한 후 돌아갔다. 이제 누군가에게 마음을 기울여 기대기에는, 그 기울기에 미끄러져 내가 다칠 것 같았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와 보니 모친이 매듭 묶인 스타킹이며, 역시 매듭 묶인 핸드폰 충전선을 들고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너는 부모님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 집 안에서 이런 짓을 어떻게 할 수 있니?
동생은 소리도 없이 입술을 깨물고 울었다. 나는 오늘 이 방 안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갈 거야. 언니, 나는 이 일들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그제야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했는 지를 깨달았다. 동생과 함께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3월 한달 간, 도망치듯 병가를 내고 집 안에만 틀어박혔다.
은과의 9년간의 연애, 그리고 영과의 짧았던 연애가 모두 나의 잘못으로 끝났다. 내가 모든 관계를 망쳤고, 신뢰를 부쉈다. 내 마음이 어딘가 비틀려서, 훼손되었기 때문에 그랬다는 핑계는 지금도 뻔뻔하다. 앞으로는 글에서 그들을 가능하면 언급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것이 그들에 대한 마지막 예의라고 생각하므로.

2월에, 네 번째 책을 맡았다. 나는 그때 아무것도 읽고 쓸 수 없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문장들이, 모든 단어들이, 모든 감각들이 죄다 증발해버리고 하얀 재만 남은 것 같았다. 지금도 나는 흰 종이가, 하얀 공백이, 빈 문서가 제일 무섭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누군가의 소중한 글에 피드백을 달아주고, 교정 교열을 보는 것 자체가 기만처럼 느껴졌다. 보석같이 귀한 원고들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급하게 책을 만들었다. 부끄러웠다. 나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2월에만 연차를 8번 썼다. 연차를 쓴 날에는 편의점에서 스타킹을 산 후 모텔방을 잡고 문고리에 목을 맸다. 아침이 오는 게 두려워 밤새 목을 맨 적도 있었다. 책을 마감한 날 사장님께 울면서 말했다. 제발 한 달만 쉬게 해주세요. 꼭 돌아오겠습니다.

3월 2일부터 회사를 쉬었다. PT를 끊었고 아침마다 자전거를 탔다. 내가 자주 달리는 자전거 코스에는 ‘느린 우체통’이 있는데, 엽서를 쓰면 1년 후에 받아볼 수 있는 곳이었다. 종종 나에게 엽서를 썼다. 곧 나아질 거야. 나아질 거야. 기도처럼, 기원처럼 썼다. 1년 후에는 이 기도가 이루어져 있기를.

3월 한달간, 나는 세상과 나와 병을 잇는 세 줄의 현이 완전히 끊어진, 망가진 악기처럼 처박혀 있었다. 마른 입술에서는 죽은 새 소리만 났다. 병을 조율하는 사람의 프라이드도, 살아야겠다는 의지도 완전히 잊은 채로, 습관적으로 목을 매며, 먹지도 씻지도 않고 잠만 잤다.

복직을 할 수 있을까, 두려웠다. 이대로 도태되어 가족의 짐만 되는 것은 아닐까. 모친은 회사를 관두라고 말했다. 나는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슬픔을 잊기 위해서라도, 우울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라도 나는 일을 해야 했다.

4월 1일에 복직했다. 회사 동기 J가 수제 케이크를 만들어서 환영 파티를 해줬다. 조금 눈물이 날 뻔했지만 참았다. 그 케이크는 정말로 맛있었다. 그래도 내게 마음을 써주는 사람이 있구나, 모든 인간관계를 정리하고 완전히 고립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이렇게나 날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구나. 케이크를 한 입 퍼먹을 때마다 마음이 감미롭게 무너졌다. 나는 언제나 내 발밑을 무너뜨리고, 다시 새로운 땅을 다지는 식으로 생존해왔다. 사람과 사랑 앞에서 마음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순간은 언제나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J는 언젠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소윤 씨는 사랑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니까요, 나는 그 말을 잊지 않으려 한다. 늘 마음에 새기려 한다. 어찌 됐건 나의 화두는 글과 사랑이다. 나는 끝까지 글을 쓸 것이며, 끝까지 사랑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 내 삶을 증명한다. 나는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다른 것들을 사랑할 수 있다. 나의 일, 원고에서 귀한 문장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 내 피드백으로 소설이 점차 나아질 때의 보람, 퇴근 후 운동을 할 때 오로지 내 육체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그런 것들을 소중히 여기며 나아갈 것이다.

J와 점심시간에 커피를 마시며 산책을 했다. 모든 것에 쉽게 무너지는 마음이지만, 봄의 화창한 날씨에는 무너지지 않았다. 주말에 비가 내려, 바닥이 온통 벚꽃잎으로 가득했다. J와 함께 꽃길을 걸으며, J는 내게 참 소중한 인연이라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 목을 매는 자해는 하지 않을 것이다. 영과는 이미 끝난 사이지만. 나는 나 혼자서 영과 약속했다. 영에 대해 마지막으로 말해도 될까. 내가 영을 잊을 수 있을까. 아직까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나와 영을 분리해야 한다. 마지막 만남에서 영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노력해야 한다고.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고. 그래야 자신을 조금 덜 미워할 수 있다고. 노력의 결과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나마 자신을 조금 덜 미워할 수 있게 된다고. 네게 주어진 일을 천천히, 하나씩 해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나를 발견해줄 거라고, 나는 나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 내게 주어진 일상을 소중히 지킬 것이다. 다시 글을 쓸 것이며, 좋은 책을 만들 것이다. 나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 이대로 죽어버리지 않기 위해.

사람을 낙원으로 삼아선 안 돼, 지속 가능한 낙원을 꿈꾸어야 한다. 어디선가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사람을 너무 사랑한다. 나는 내 일을 사랑하고, 이렇게 글을 쓰는 시간을 사랑한다. 여전히 내 삶의 화두는 사랑이다. 나는 사랑으로 회복할 것이다. 다시 타인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법을 연습할 것이며, 이제는 그 기울기에 내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을 것이다. 이제는 이별 앞에서도 조금씩 담담해지는 연습을 할 것이다.

나는 내일 아침에도 7시에 일어날 것이며 7시 50분에 출근해 9시 30분까지 사무실에 도착한 후, 컴퓨터를 켜고 부팅이 되는 동안 담배를 한 대 피울 것이다. 원고를 꼼꼼히 읽으면서 귀한 문장에 밑줄을 칠 것이다. 오늘은 이 문장에 밑줄을 쳤다. ‘모든 아침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멋지고 또 좋다는 것을’.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내일 아침을 꽤 괜찮게 맞이할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이 책이 어떻게 만들어질까, 사뭇 기대된다.

나를 거쳐 간 모든 사람이 이제는 내가 없어도 행복하기를. 은과 영이 행복하기를. 나는 조금씩 나아가고 있으니까. 병에서도, 삶에서도, 나아가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남을 것이니까. 그러니 모두 각자의 길을 잃지 말고, 죽지 말고, 살아서, 아름다운 여정이 되기를.

작가의 이전글 투병 일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