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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착길 Feb 20. 2022

쿵하고 떨어졌다



졸업을 앞둔 열세 살 겨울

풍경화 그림 그리기 대회였던가

목련의 작은 겨울눈이 커다랗게 보이면서

나를 봐줘 나를 그려줘 나를 생각해줘 하는 듯해

절지 큰 스케치북 안에 목련의 가지와

겨울눈 하나만 커다랗게 그렸다

내 그림이 이상하지 않을까

나는 왜 이게 보이고 이걸 그리고 싶지

반신반의하면서도 그리고 싶었다

친구들 그림은 생각이 안 나지만

보송한 솜털 옷을 입은 겨울눈은 생각난다

꽃과 잎을 품고 추운 겨울을 견디는

목련의 겨울눈이 신비롭고 아름다워서

어떻게든 남기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도 겨울만 되면 목련 가지에 눈이 간다


그 전이나 후에도 순간은 내게 말을 걸어왔다

학교 가는 길 아침햇살이 만든 친구들 그림자

길가 코스모스 위 이슬 맞고 잠든 잠자리

교문 가에 서서 기다리는 커다란 플라타너스

돌아오는 길 그림처럼 선명한  

동네에 들어서면 시끌시끌 어른들 속 아빠 목소리

집 마당에 다다르 커다란 감나무와 할아버지

늘 바쁘지만 화를 내지 않는 엄마

잘 싸우지 않는 사 남매 


아직도 그 순간들이 마음속에서 반짝인다

글과 그림으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족하게 느껴졌던 어린 시절


졸업하는 날

하염없이 펑펑 눈물이 났다, 그날부터

졸업식 사진마다 눈이 퉁퉁 부은 나뿐이다

어떤 예감이 들어 그리 아프고 슬펐을까

유년 시절만큼 자유롭고 아름답고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알아버렸을까

역시나 졸업 후의 삶은 늘 버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쿵 하고 떨어졌다

커다란 폭탄이 등 아래를 뚫은

아이와 함께 내 몸에 쿵 떨어졌다

그땐 몰랐다, 별 같은 아들인 줄만 알았다

그 아이가 내게로 온 지 십 년이 된 바로 그날

내가 태어난 새벽 세시쯤

아이의 십 년을 기뻐하며 글을 쓰려다

둥둥 두근두근 심장이 쿵쾅거리더니

눈물과 함께 흘러나왔다, 그날의 순간들이

정지한 장면과 소리들이 멈춘 마음이

하나 둘 정리가 되면서 써졌다  

줄글로 쓰려고 시작했는데 시처럼 쓰고 있었다

노래처럼 나오던 말들이 시처럼 나온 그 순간

아들의 생일 즈음, 요즈음 쓰고 있는 게 시라면

아마도 그때 쿵 떨어진 것 같다, 내 몸에




아, 내 예감은 틀렸다

그렇게 울지 않아도 됐는데

이렇게도 신비스러운 존재들을 만나

다시 자유롭고 아름답고 행복할 수 있는데

뭘 많이 모르는 어린 예감에 몸을 맡겼구나


아이들의 유년시절 안에 함께 살면서

상상 못 한 감정을 배우고 있다, 또

내 몸에 쿵 떨어진 시를 만난 뒤부터는

순간들에 답하며 자유롭게 유희하는 중이다

다만 사물과 사람의 마음에 어울리는

이름을 짓고 싶다, 예의를 지키면서.






<시가 쿵 떨어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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