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 잡채?

어쩌다 보니

by 착길


"누나야, 집 가는 길에 들렀다 가."

"왜?"

"집에 있는 책들도 가져가고 착길이가 잡채를 했는데 가져가라고."

"웬 잡채?"

"응... 착길이가 운전면허도 따고 해서..."


설거지를 하던 중에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고무장갑 낀 채 손사래를 치면서 그게 아니라는 신호를 강하게 보낸다. "애들이 먹고 싶어 해서 한 거야. 아들 생일날 해주려 했는데 그때 너무 피곤해서 미루다가 오늘 시간이 돼서 한 거야."라고 들릴 듯 말 듯 내 뜻을 피력한다.


통화를 끝낸 남편에게,

"아니, 이 사람아! 그걸 자랑하고 싶었어?"

"응, 어머니께는 아직 안 했네."

대략난감 하다.




아이들 고모네가 근처에 살고 있어서 가끔씩 오가며 시댁에서 보낸 먹거리를 서로 배달해주면서 지낸다. 주로 받을 때가 많은데 오늘은 평소보다 당면을 많이 삶는 바람에 고모네 조카들 생각이 나긴 했다. 결국 내가 고모네 드리자고 해야 비로소 연락하는 남편이지만.


열흘 전에는 시댁에 잡채를 두 분이 드실 만큼 보내드리기도 했다. 주로 어머니가 음식을 해서 보내주시는데 대뜸 보내드려서 놀라셨을지도 모른다. 그날 역시 입맛 까다로운 작은 아이가 잡채가 먹고 싶다고 해서 부랴부랴 만들어 놓은 때였다. 그때도 무슨 날은 아니었는데...


지난 크리스마스날도 잡채를 만들었다. 그날은 이모부 산타가 어항 배달 오는 날이라 이모네까지 잡채를 보낼 수 있었다. 조카의 입에 잘 맞는지 맛있게 먹는 사진을 동생이 보내줬다. 둘째가 전부터 먹고 싶다고 말했던 터라 재료는 준비해 둔 상태였다. 크리스마스날 기분 좀 내려고 만들어 보았는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왜 이럴까. 전엔 재료 손질부터 당면 삶아 볶기까지 여간 귀찮고 버거웠는데 그날은 무슨 힘이 났는지 뚝딱뚝딱 만들어지는 거다.


내가 왜 이러지? 왜 예전처럼 안 힘들지? 하다가 친정엄마가 뚝딱뚝딱 잡채를 만들어주셨던 모습이 떠올랐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을 빠르고 맛있게 만들어 먹이던 엄마. 난 입맛이 넷 중 제일 까다로웠는데 잡채랑 잔치국수는 배가 터지도록 먹어댔다. 잔칫날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좋아했고 일이 많은 엄마한테 종종 먹고 싶다고 했던 것 같다. 지금 우리 둘째처럼.


입맛이 까다롭고 입이 짧아 밥을 잘 먹지 않는 둘째가 먹고 싶어 하는 것은 어떻게든 만들게 되는 나를 돌아보며 지난날의 엄마가 보였다. 행동이 느리고 뭐든 천천히 해내는 내가 딸이 먹고 싶다는 잡채를 뚝딱 해내는 걸 체험하며 스스로도 통한 요즘이다.


그래서 오늘도 저녁 메뉴는 마땅치 않고 둘째의 반찬도 없고 하니 지난주에 사놓은 재료들로 만들어 본 것이다. 오늘 운전면허증을 받아온 날이라 기쁘기도 하지만 결코 그래서 만든 것은 아닌데, 남편은 그렇게 생각 되나 보다. 내심 내가 면허 딴 것을 나보다 더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아들은 어제 "엄마, 14층 이모가 운전면허 딴 거 축하한대."라고 마스크를 쓴 채 중얼댄다. "응?" 엘리베이터에서 만나서 얘기를 주고받은 듯하다. 내가 면허 딴다고 말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아들도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는 것 같다. 일단 따서 망정이지 잘 안 됐으면 두 남자 상심이 컸을 뻔했다.




*저만의 잡채 레시피를 올려봅니다.


자른 당면 20인분용 (자르지 않은 당면은 삶은 뒤 자를 때 힘들어요)

시금치나 부추, 느타리버섯이나 표고버섯, 양파, 대파, 당근만 있어도 맛과 색이 조화로워요.

시금치와 버섯을 손질한 뒤 끓는 물에 데치고 건져서 꼭 짠 뒤 국간장 조금, 소금 살짝, 참기름 조금 넣고 무쳐둡니다. 부추는 식용유 조금 두르고 아주 살짝 볶아야 해요. 초록이 예쁠 때까지요.

양파와 대파와 당근은 먹기 좋게 채 썰어 식용유와 소금 살짝 뿌리고 좋은 냄새가 날 때까지 볶습니다.

커다란 양푼에 무치고 볶은 재료를 담아 놓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잡채 맛의 핵심은 당면입니다. 적당한 간에 탱탱하면서 부드러우면 좋아하지요.

넓은 냄비에 물이 끓으면 당면을 넣고 설명서를 보고 삶습니다. 저는 그 시간보다 살짝 더 삶아요. 그러면 면이 더 부드럽고 소화가 잘 되거든요. 살짝 불은 당면은 잘 볶아주면 부드럽고 탱탱해집니다.

다 삶아진 당면을 찬물에 식히고 채반에 바쳐 물을 빼줍니다.


당면 볶을 양념소스를 만들기 위해 진간장, 국간장, 올리고당이나 설탕, 참기름, 식용유, 다진 마늘이 필요합니다. 진간장이 밥숟가락으로 10 이면 국간장은 1 보다 작게 넣고요. 올리고당은 5 이상으로 단맛을 좋아하는 분에 따라 조절하면 되는데 우리 집은 7 이상 넣습니다. 참기름은 3 이상 넣어주고요. 다진 마늘 한 숟가락 넣고 휘휘 저어놓습니다.


넓고 깊은 팬에 양념소스를 넣고 식용유 5 이상 두릅니다. 물도 몇 스푼 넣어 간을 맞춥니다. 살살 저어주면서 끓어오를 때 삶은 당면을 넣고 볶습니다. 양념이 고루고루 배도록 버무려줍니다. 시간보다는 당면의 색과 윤기에 집중합니다. 진간장과 물로 색을 조절하세요. 뒤집으면서 당면이 옅은 갈색이 되고 윤기가 흐르면 맛있게 볶아진 것입니다.


커다란 양푼에서 기다리는 채소들과 볶은 당면을 버무립니다. 마지막으로 참기름과 통깨를 빠트리면 안 되겠지요. 사실 우리 집 요리의 맛을 결정하는 건 친정엄마의 참기름과 통깨입니다.

시중의 참기름과 통깨만으로도 맛은 좋을 거예요. 통깨는 손으로 으깨면서 뿌리면 더 고소합니다.


저마다의 입맛이 다르니 양념소스 비율을 맞추는 데에는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어요. 저도 이렇게 만들기까지 여러 번의 시도가 있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