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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덕 Dec 21. 2022

부산에서 태어나다

나는 1956년 7월 21일(음력)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정확하게 몇 시에 어느 동네에서 태어났는지는 잘 모른다. 이전에는 관심이 없었고, 지금은 알고 싶어도 답해 줄 사람이 없다. 알만한 사람들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나의 본적 주소는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7-73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이 기록은 혜화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1968년쯤에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추측된다. 왜냐하면 당시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 나에게 호적이 없다고 하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오라고 했던 일이 기억나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는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형들과 지내다가 해방 이후 홀로 남한으로 왔다. 사진을 보면 아버지는 키가 크고 말랐으며 얼굴이 갸름하다. 아버지는 부산에서 시계 장사를 하던 중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였다. 아버지는 노래를 잘해서 기생으로부터 공짜 술을 얻어먹을 정도였으며, 인정이 많아서 남을 잘 도와주었다고 했다.

아버지에게는 3명의 형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셋째 형이 아버지에게 가장 잘 해주었다. 그런데 그 셋째 형이 남한으로 와서 아버지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아버지는 너무 기뻐서 어머니와 함께 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노동자 복장의 큰아버지와 아이를 업은 큰어머니의 모습은 보기에 딱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이사 와서 큰집 가족과 살림을 합쳤다. 그리고 큰아버지와 같이 극장 <단성사> 옆에 있는 상점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시계를 판매하고, 큰아버지는 금은보석을 판매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염려했던 대로 두 가족은 종종 갈등을 겪었다. 특히 아버지와 큰어머니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이 큰집과 살림을 합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아무리 의좋은 형제일지라도 결혼 후에 살림을 합쳐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어머니는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외증조부 내외를 비롯하여 3대가 함께 살았다. 외증조부는 해방 이전 독립군을 돕다가 일경에게 잡혀 고문을 받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남한으로 내려오려고 했으나 식솔들이 많아서 실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막내아들(어머니의 삼촌)은 남한으로 내려보냈다. 그가 인민군으로 징집될까 봐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어머니의 삼촌은 부산에 있는 회사에 취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신의주에 딸을 두고 왔기 때문에 외증조부는 어머니에게 그 딸을 삼촌에게 데려다주도록 했다. 이때 어머니 나이는 열세 살이었다. 어머니는 심부름을 위해 삼촌 댁에 갔다가 삼팔선이 막히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이때부터 삼촌 댁에서 지내다가 23살 때 아버지와 결혼하였다. 어머니는 결혼 초기에는 행복했다. 아버지가 사랑해주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울로 이사 온 후부터는 편치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한의사였던 외조부와 많이 닮았다고 했다. 외조부는 항상 책을 끼고 살아서 밥 먹을 때에는 제발 책을 보지 말라고 외조모로부터 잔소리를 많이 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의 돌 사진을 보면, 잔칫상 앞에서 내가 까만 돌옷을 입고 연필을 물고 있다. 이 사진은 대학교수가 된 나의 미래를 예시한 것 같아 신기하다.


돌 사진1


돌 사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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