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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고있습니다] 내 인생의 책 - 어린왕자

인생의 책이 있으신가요?


너무 거창하다면, 집에 두고 자주 또는 가끔 힘이 들 때 꺼내보는 책이 있으신가요?


저에겐 [어린왕자]가 그런 책입니다. 매년 새해가 되면 [어린왕자]를 다시 꺼내봅니다. 매해 고민과 이슈에 따라 다가오는 문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올해 제게 다가왔던 문장은 이 부분이었습니다.


내가 소행성 B612에 관한 이런 세세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그 번호까지 밝히는 것은 모두 어른들 때문이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여러분들이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고 어른들에게 말하면, 어른들은 도무지 가장 중요한 것은 물어보지 않는다.

<그 애의 목소리는 어떠니? 그 애는 무슨 놀이를 좋아하니? 그 애도 나비를 채집하니?> 절대로 이렇게 묻는 법이 없다. <그 앤 나이가 몇이지? 형제는 몇이나 되고? 몸무게는 얼마지? 그 애 아버지는 얼마나 버니?> 항상 이렇게 묻는다. 이렇게 묻고 나서야 어른들은 그 친구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여러분들이 <나는 아주 아름다운 장밋빛 벽돌집을 보았는데요, 창문에 제라늄이 있고, 지붕 위에 비둘기가 있고...> 이런 식으로 어른들에게 말한다면, 어른들은 그 집을 상상해 내지 못할 것이다. 어른들에겐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는 10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 비로소 그들은 소리친다. <정말 예쁜 집이겠구나!>


어른들은 이렇다.
그들을 탓해서는 안 된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에게 아주 너그러워야 한다.



소아치과 진료실에 있다 보면 때때로 아이와 부모님의 사정이 부딪히는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진료실에 아이와 엄마가 들어옵니다. 아이는 쭈뼛거리며 못내 불안해하는 표정입니다. 그리고 의자에 눕기 전 엄마에게 확인합니다.


“엄마, 오늘 보기만 하는 거지?”


엄마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아이는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절 올려다봅니다. 저는 그렇다고 확신시켜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최대한 온화한 표정을 지을 뿐입니다. 역시나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습니다. 충치가 생겼습니다. ‘보기만’ 할 수 없게 됐습니다. 엄마에게 ‘원하신다면’ 오늘 치료를 해드리겠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아이의 동의를 구하신다면’이라는 말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제부터 팽팽한 긴장이 시작됩니다. 엄마는 오늘 하고 가자고 하고 아이는 ‘보기만’ 하지 않았냐고 합니다.


엄마에게도 사정은 있습니다.

 휴가를 냈든 아니든 예약시간에 맞춰 오는 것이 너무 힘들었을 것입니다. 아이는 아마도 치과에 오기 전부터 두려움에 엄마의 진을 뺐겠지요. 그래서 일단 ‘보기만’ 하자고 달래서 왔을 것입니다. 오늘 치료를 하지 않으면 다시 이 과정을 반복해야 합니다. 당일 치료를 해준다는 저 의사의 말이 바뀌기 전에 얼른 아이의 협조를 얻어내야 합니다. 엄마의 마음은 바쁩니다.


아이에게도 사정은 있습니다.

안 그래도 불길한 생각에 엄마에게 여러 번 물었습니다. 엄마는 분명히 ‘보기만’ 한다고 했습니다. ‘보기만’ 한다기에 오기 싫은데 마지못해 왔습니다. 그런데 역시 ‘보기만’하지 않습니다. 나 빼고 다 거짓말쟁이들입니다. 당하는 건 난데 결정은 거짓말쟁이들이 다 합니다. 아이의 마음은 억울합니다.


아이와 엄마는 협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대화를 하고 들어오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치료를 할 준비를 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엄마의 사정을 봐주기 때문입니다. 

억울하고 무섭지만 사랑하는 엄마니까 꾹 참아봅니다. 그래도 참기 힘들면 울음이 터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 아이들은 너그럽습니다. 그런 아이의 마음을 아는 저는 늘 언제나 세상 최고의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선생님이 하나도 안 아프게 충치 벌레 잡아줄게!”

이렇게 하이톤의 목소리로 소리치며 말입니다.






아이들을 보다보면 과연 어른이 된다고 해서 더 현명해지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도 정확하게 알고 부모의 감정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른 생각에 맞춰 설명을 해주기도 하고 사정을 봐주기도 합니다. 무서운 감정도, 두려운 감정도 압니다. 그것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어른 시각에 맞추어 멋진 집을 너그럽게 표현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어른들은 가끔, 아니 자주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짜증을 냅니다. 자신의 감정을 잊으니 타인의 감정 또한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서로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부유합니다.


그리스어로 진리는 ‘알레테이아(잊힌 것들)’이며, 영어 educate(교육하다)의 어원은 “본래 내면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다” 라는 뜻을 지닌다고 합니다. 모자 속에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보았던 시절이 아마 우리 모두 있었을 것입니다. 그 시절의 생각을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조금 더 현명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떠신가요. 당신의 보아뱀은 안녕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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