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괜찮네라고 생각했을 뿐인데 정신을 차려보니
리더십보다 중요한 건
좋은 사람을 곁에 두는 것
나는 리더십이 과한 사람이다. 세이클럽 방장부터 중고등학교 반장, 대학교 조장, 동아리 팀장 등 '장'을 항상 하고 살았다. 직장은 조직 구조적으로 상대적으로 낮은 연차가 '장'이 되기 어렵지만 일단 회의실에 들어가면 내 목소리가 제일 크다. 지난한 회의를 마치고 다들 배가 고파질 때면 '요즘 00가 맛있대요'라고 운을 띄워 주변 사람들이 많은 선택지를 두고 고민할 필요 없이 가이드를 주는 편이다.
복잡한 현대사회의 필수질환이라는 결정장애가 없는 나라는 인간. 사람들이 몸을 배배꼬고 망설이는 꼴을 못보는 나라는 인간은 선후배가 섞여 식사하는 자리에서 돈 안내려고 눈치보고 있으면 그냥 내가 내거나 돈을 낼 사람을 지정해버린다. (**님 밥사는거 한번도 못본거 같으니 한번 시원하게 쏘시죠) 이렇게만 말하니 상당히 안하무인 같지만 또 소심한 A형이라 강요는 하지 못하고 '넛지효과'(옆구리를 찌르는)만 줄 뿐.
이런 내가 유일하게 리더십 발휘를 전혀 못한게 '결혼'이다. 30대에 들어서니 주변 친구들이 '결혼은 어떤 사람이랑 해야하는 가'에 대한 난상토론이 벌인다. 외모는 최소 뽀뽀는 할수 있어야 한다, 자산은 최소 5억은 있어야한다, 친구 좋아하지 않아야 한다, 가정적인 아버님 밑에서 자란 남자가 좋다 등등 디테일하게 결혼 상대의 조건을 제시하는 친구들. 다 갖췄는데 대머리면 어떡하냐며 마치 자신들이 그 상황에 처한 것처럼 눈가에 습기가 가득찬 그녀들의 시선이 갑자기 나를 향한다.
"근데 넌, 이런 거 다 생각하고 결혼 한거야?"
응 나는 만20세, 옛날같으면 갓을 쓴다는 약관의 나이부터 결혼 상대에 대한 명확한 가치관을 세우고 내가 26세~29세 구간에 다달았을 때 어떤 조건을 가진 사람과 결혼할 지 정치,사회,경제,문화적인 것들을 5점 척도로 분석하여 일정 점수에 다달은 인간이 나타났을 때 '진돗개'에 준하는 적색경보를 내려 그 사람을 포위했지.......는 뻥이고 그냥 아무생각 없이 결혼했다.
'그냥 했다'는 나의 대답에 그녀들은 2가지 반응을 보였다. 첫번째 반응은 너 지금 잘난척 하는 거냐? 이상하게도 내 친구들은 우리남편을 정말 괜찮게 본다. 너네가 인스타만 봐서 그렇다. 이건 무시하고, 두번째 반응은 아무 조건 안보고 결혼하는 게 가능하냐? 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상하게도 가능했다. 남편과 만날 때즈음 나는 김영하 작가의 책이나 강의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김영하 작가는 말했다. 이런 저런 사람을 만나느라 인생을 허비하지 말라, 자신과 정말 잘 맞는 사람에게 시간을 투자해라. 당시 이런저런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은 나는 이 말을 가슴에 새겼다.
20대에 만난 남편은 마음이 태평양처럼 넓고 돈이 모래알처럼 넘쳐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만화작가를 좋아했고 (우라사와 나오키, 아다치 류) 살아온 인생이나 학력수준이 비슷했다. 남편이 유머를 던지면 나는 맞고 (웃겨) 쓰러졌다. 같이 있으면 즐거웠다. 그 뿐이었다. 28살의 어느 여름, 남편이 결혼을 하자고 했다. 왜 나야? 라고 물었다. 멘탈이 강해서 좋단다. 예쁘다도 아니고 멘탈이라니... 곰곰이 생각해보니 난 멘탈이 강했다. 나를 잘 본 것 같았다. 그래서 알았다고 했다. 그 후에는 그가 하자는 대로 따라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광화문의 한 예식장이었다.
결혼을 하고 주변을 보니 정말 내가 '아무생각 없이' 결혼한 게 맞았다. 내가 결혼하고 나니 친구들이 명절마다 친척집에 가는 걸 힘들어했다. '시집은 언제 가니?' 난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결혼 적령기가 되기 전에 결혼을 해버렸으니. 게다가 결혼 선배가 되니 '어떤 사람이랑 결혼해야해요?'라고 묻는 이들이 많아졌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호기심 가득한 그들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 난 진짜 그냥 ... 그냥 했으니까. 머리를 긁적이는 나에게 '결혼하고 행복하세요?'라는 질문이 훅 들어온다. 망설임 없이 고개를 상하로 끄덕인다. "응, 좋은 사람이거든."
벽돌집을 지은 셋째 돼지만 살아남은 [아기돼지 삼형제]를 남편이 아이에게 읽어주고 있다. 이야기를 차분히 듣던 아이가 묻는다. '아빠, 이 이야기의 교훈은 뭐에요?' 옆에서 두 사람을 보고 있던 나는 '준비된 사람은 위기가 오지 않는 게 교훈이다'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놨다. '응, 주변에 셋째돼지 같은 사람이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다 벽돌집을 짓게 되는거야. 좋은 친구를 주변에 두면 어려운 일이 생겨도 이겨낼 수 있는 거야." 오... 일리 있는 말이었다.
결혼 적령기, 결혼을 할 생각이 있는 사람일수록 중요한 건 경제적 사회적 조건이 아니다. 조건 좋은 사람만 주변에 두면 상대방도 나를 조건으로 평가하게 되고 관계에서 실패할 확률이 높다. 조건 따지다가 골드미스, 골드미스터가 된 사람은 내 주변만 있는 건 아니다. (나랑 잘 맞는) 좋은 사람을 계속 곁에 두면 그들 중에 내 짝이 생긴다. 평범한 내가 백만장자와 결혼할 확률은 낮아지지만 인생이 평온하게 흘러갈 확률이 높아진다. 딱히 리더십을 발휘하지 않아도 진두지휘 하지 않아도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다면 소소한 행복과 평온한 일상은 그림자처럼 따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