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에 투자하고 소비를 아끼는 사람들
스티브잡스와 마크 저커버그처럼
청담동에 살면서 가장 당황스러운 날이었다. 평소처럼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어떤 분이 내 어깨를 톡톡 쳤다. 이 동네에 슈퍼 주인과 고깃집 사장님 외에는 얼굴을 튼 사람이 없던 터. 평소 날 애타게 부르며 쫓아오는 학습지 회사 직원이나 우유배달 아주머니란 생각에 오만상을 쓰며 뒤를 돌았다. 내 시야에는 포근한 인상에 화장끼 없는 한 여자가 수줍게 서있었다.
“라하엄마시죠? 햇님반 서우 엄마에요.”
수줍은 여자에게 순식간에 번호가 따이고 바로 ‘햇님반 톡방’이라는 곳에 입소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반가워요? 등 인사말을 고민하고 있는데 내가 말 하기도 전에 이미 모두가 열렬히 환영해주고 있었다. 시작되었구나. 말로만 듣던 엄마들 모임.
사실 나에게 엄마들 모임이란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번 발을 담그면 발을 빼기 어려울 정도도 중독적이고 생동감 넘치나 결국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다 파국으로 치닫는 것. 많이 엮이는 게 좋지 않을 거란 생각에 알림을 꺼놓고 눈팅만 하고 있는 어느 날, 누군가 날 태그하며 말을 걸어왔다.
“어머니들, 우리 지금 브런치 벙개해요!”
비상이다. 브런치 모임이라니. 자고로 엄마들의 브런치 모임이란 온몸에 금은보화를 주렁주렁 달고 의자에 H브랜드 또는 C브랜드 가방을 걸어놓은 채 대화 도중 스리슬쩍 내가 입은 옷의 브랜드가 보이도록 하는 게 목표인 허세 모임 아니던가. 게다가 ‘지금’ 모이자니. 소풍날도 전날 새 옷 사러가라고 예고를 해주는데 준비할 시간도 안주다니.
“@라하엄마 도 오실거죠?”
당황한 채 톡방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어떡하지. 나는 가지고 있는 보석이라곤 결혼반지 뿐 이고 비싼 가방도 없고 비싼 옷도 없는데. 일단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여자들 세계에 대해 잘 모르는 남편은 동네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가서 맛집 정보나 얻어오라는 속편한 소리를 하며 다녀오라고 했다. 계속 망설이다가 최근 어린이집 원장님의 태도가 좀 거슬려서 그들에게 상담을 받을 겸 용기를 냈다.
일단 옷장을 열었다. 다행히 눈앞에 전투복(?)이 보였다. 복직 할 때 입으려고 사뒀던 프릴 원피스와 결혼 예복 자켓. 무엇보다 시어머니께서 물려주신 명품백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실 시어머니에게 이 가방을 받을 때는 색감이 진하고 무거운데다 로고가 사방팔방에 박혀있어서 촌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사방에 박힌 브랜드 로고가 탄창의 총알처럼 안정감을 안겨줬다.
전투준비를 끝내고 거울을 한번 휙 본 뒤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모임 장소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는 청담동의 한 카페였다. 걸어가며 건물에 반사된 내 모습이 꽤 맘에 들었다. 이정도면 그래도 그렇게 꿀리는 건 아니겠지. 특히 난 이 가방을 들고 있으니 날 많이 무시하진 않을 거야. 심장을 부여잡듯 가방을 끌어안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한 10분쯤 걸었을까. 시야에 노란 테라스가 들어왔다. 카페 앞 화분 사이로 삼삼오오 모여있는 담소를 나누고 있는 한 무리가 보였다. 직감했다. 저분들이구나. 안그래도 무거웠던 발걸음이 더 무거워졌다.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다가가는데 무리 중 한명이 멀리서 날 알아봤다.
“어, 왔네. 이리와요.”
이렇게 많이 남았는데 벌써 알아보다니. 눈썰미 좋은 사람 같으니라고. 하이힐을 신은 채 우아하게 걸어가고 싶었지만 모두 나만 쳐다보고 있어서 모래주머니 찬 사람처럼 뒤뚱거리며 뛰어갔다. 그런데 거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그걸 상대방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모두들 이렇게 입고 있었다.
나는 혼자 이렇게 입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유니클로 화보 찍으러 온 모델들과 촬영장 쫓아온 친구느낌이라고 할까. 확실히 그들과 나는 이질적이었다. 이 곳에 오기 전까지 옷을 고르고 걱정했던 것들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그런 고민과 걱정을 했던 자체가 그들과 태생적으로 벽이 있는 느낌이었다. 한 엄마가 ‘우리랑 만나고 또 어디 약속 있으신가봐요’라고 센스있게 말해주지 않았다면 코박고 커피만 마시다 집에 갈 뻔 했다.
그 이후로도 엄마들 모임을 몇 번 했지만 다들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최대한 단순한 디자인의 편리한 옷차림과 에코백. 종종 꾸미고 나타는 분들도 계셨지만 많진 않았다. 중요한 건, 대화 속에서 복장이나 보석, 가방 이런 아이템에 대한 화제는 적었다. 그저 건강이나 가족에 대한 대화가 주를 이뤘다.
얼마 후 깨달았다. 청담동의 일상 속에서 명품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휘두르고 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다. 누군가 명품을 많이 사고 과시한다면 그는 진정한 부자가 아닐 확률이 높다. 명품을 몸에 휘감았다는 것은 자신을 타인에게 과시하고 싶어하는 경우인데 이건 내가 경험한 청담동 사람들과 좀 거리가 있다.
만원짜리 천가방을 들어도 되는데 굳이 500만원짜리 가방을 사는 이유는 ‘관계지향적 소비’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사실 소비라는 건는 필요에 의한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필요하면 사는 것이고 필요하지 않으면 사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관계’라는 것이 개입되면 필요에 의한게 아니라 ‘보여주기 위해’ 소비를 하게 된다. (출처: EBS자본주의)
청담동 사람들은 이미 자산이 크게 형성된 사람들이다. 남에게 자신을 정당화할 필요가 없고 뭔가를 보여줄 필요가 없다. 이미 청담동에 산다는 자체가 모든 걸 보여주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관계가 개입된 소비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산증식을 위해 더 아끼고 소비에는 엄격하고 절약하는 경우를 더 많이 봤다.
앨리스들이 월급으로 명품백 하나 장만해 청담동 판타지에 젖을 무렵, 청담동 사람들은 명품백에 대해서는 시큰둥하다. 그들은 차라리 명품을 찍어놓은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 하는 화보집을 사보며, 이런 담론을 즐긴다. "고야드가 첫 선을 보였던 가방의 수직 스트라이프와 네이밍 디자인이 이후 다른 명품 브랜드 백에서도 보이는 것은 우연인가 카피캣인가?". 또 자녀에게는 바비인형이 아니라 바비인형 사진이 가득한 120만원짜리 화보집을 사주며, '중요한 건 물건이 아니라 안목'이라고 가르친다.
- 양선희 중앙일보 논설위원('13.2.2)
엄마들 모임 이후로 나도 단촐한 옷차림을 선호하게 됐다. SPA 브랜드 티셔츠를 구매하고 스포츠 브랜드에서 기능성 반바지를 주로 사서 입는다. 이런 걸 사고보니 프릴 원피스보다 이런 단순한 옷차림이 어울리는 게 더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소위 '핏'이 나오려면 평소 식단관리와 운동을 게을리 하면 안된다. 어떻게 보면 저런 모습이 돈 많고 시간 많은 부자들의 단상이 아닐까 싶고.
매주 금요일은 회사의 캐쥬얼 데이라 오피스룩 대신 자유복장으로 출근한다. 이 날은 마크 저커버그처럼 무채색 티셔츠와 단색 바지를 입는다. 이렇게 입고 회사에 나타나면 많은 사람들이 걱정한다. 청담동에서 그러고 다니면 사람들이 무시하지 않아? 그럴때마다 고개를 저으며 한마디 한다.
“백화점에서 VIP를 알아보는 방식이 있지. 바로 지금 내 복장에 슬리퍼 신고 다니는 사람.”
학동로에 가까운 청담동에서 경험한 개인적인 생각과 의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