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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Nov 25. 2023

[팀장]을 해야겠습니다.

왜요? 제가요? 지금요?



성급한 책임충으로 살지 말걸 그랬어




모든 것이 그러하듯 그저 조용한 날이었다. 전란 직후 자연적 인구감소가 일어나듯 한바탕 폭풍이 쓸고 간 자리에는 황량함 뿐이었다. 감사, 징계, 대기발령, 해고 등 무시무시한 단어가 점멸하던 모니터는 이제 새하얀 공백만 띄워져 있었다. UFC 링 위에 올라가는 선수처럼 손목을 가볍게 풀고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xx법인 재건 방향성’.      


‘방향성’이라고 썼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사막처럼 망망한 곳에서 방향은 의미가 없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으라는 ‘지시’만 있을 뿐. 어떻게 하라고 알려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이럴 때는 혼자 끙끙 앓는 건 보다는 동료나 선배들에게 의견을 물어야 한다. 병도 소문내면 낫는다고 하니까. 오프라인으로 뒀던 메신저를 온라인으로 바꾸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메신저창이 흔들린다.      


“발령 뭐야?”

“너네 상사 바뀌는 거야?”

“누가 되는 거야?”     


나도 모르겠다. 모두 다 날아가버렸다. 객관적으로 잘못한 건 맞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하루아침에 한여름밤의 꿈처럼 사라져 버리다니. 인생무상이라곤 하지만 이렇게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게 살벌했다. 메신저 창 중에 제일 친한 동료 것을 골라 “등골이 오싹하다.”라는 말만 남겼다. 그나저나 다음 상사는 누가 될까. 얼마 전 주재원이었던 D부장? 아니 그 사람은 지금 부서에서 인정받고 있어서 다시 여기로 오진 않을 것 같고. 아님 회계부서의 A부장? 그 사람은 영업을 못 뛰는데. 아님 전략파트의 C부장? 그 사람이 그나마 유력하긴 한데 이 아사리판에 누가 총대를 멜지 의문이었다.      


텅 빈 보고서의 존재는 이미 잊고 동료들과 푸념 섞인 메신저를 하고 있는데, 이 칼바람의 기획자인 센터장님이 내 이름을 부른다.


“시드니, 차 한잔 하자.”     

참고로 회사에서 상사에게 듣는 ‘차 한잔 하자.’의 의미는 마누라들이 ‘여보, 우리 이야기 좀 할까?’급의 공포와 압박이다. 100%의 확률로 나쁜 이야기이며 200%의 확률로 갈굼을 당하는 거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으로 다이어리를 들고 그녀를 따라갔다.      


1층 카페에 도착하니 센터장님이 개인카드를 꺼내며 ‘뭐 마실래?’라고 묻는다. 그녀의 개인카드를 보는 순간 공포는 배가가 되어 전신이 옥죄어오는 느낌이 든다. 맨날 법카만 쓰는 센터장님이 개인카드를 꺼냈다는 건 본인도 희생을 감안하고 할 대화가 있다는 거다. 그녀의 얼굴에 대고 '안 먹고 안 듣고 싶습니다'라고 하고 싶었지만 이미 흐름을 놓쳐버렸다.      


 인적이 드문 자리에 앉으니 일장연설이 시작됐다. 이미 100번쯤 들은 내용이라 레퍼토리까지 외우고 있었다. 멍하니 음료를 쳐다보고 있는데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이 신기루처럼 보였다. 이러다가 나도 날리는 건 아닐까? 대체 센터장님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신기루 속으로 들어가 몰디브나 하와이로 순간이동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예상못한 단어가 내 귀를 관통했다.  

    

“그래서, 남 과장이 팀장을 해야겠어요.”

굽었던 등이 갑자기 펴진다.

“팀... 팀장이요?”

“네. 축하합니다. 남팀장.”     



그 뒤로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아니 거짓말이다. 팀장이란 단어가 들리자마자 많은 똥들이 뇌리를 스쳐갔다. -100%인 골칫덩이 사업, 돈을 쏟아부어도 늘지 않는 고객, 매일 할인만 요구하는 파트너사, 팔면 팔수록 마이너스인 제품들 그리고....... 똥 싸놓고 튄 전임자들. 이 거대한 똥덩어리가 23년 7월, 고우석이 던지는 160km 강속구처럼 손안에 떨어졌다.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부장이나 임원이 되는 꿈을 꾼다고 한다. 회사에서 고속 승진을 해서 인정받고 임원이 되고 언젠가 사장까지 꿈꾸는 삶. 미안하지만 나는 입사 10년 차에 승진경쟁을 겪으며 회사에 대한 정을 떼어내 버렸다. 일보다 인간관계로 평가받은 세태에 큰 상처를 받고 회사에서는 돈 주는 만큼만 일하고 퇴근 후에는 글을 쓰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벼락을 맞은 듯 갑자기 팀장이라는, 큰 직책을 달아버렸다.   

   

자리에 앉아 머리를 감쌌다. 아무래도 못할 것 같았다. 특히 –100%인 사업을 수익화하라는 과제는 죽어도 못할 것 같았다. 주식 하나도 제대로 못 골라서 –40% 수익률인데 회사 사업을 100% 수익화하는 걸 내가 할 수 있을 쏘냐. 센터장에게 전화를 걸어 못하겠다고 해야 하나 망설이는데 내 시야에 어떤 장면이 들어왔다.  

   

황량한 사무실에서 타타탁 키보드를 치고 있는 후배들. 보나 마나 이유 없는 엑셀이나 PPT를 만들고 있을 터. 내 자리 쪽으로 가니 바로 밑에 후배가 법인 직원과 통하고 있다. 그게요. 아니요. 저희도 맞춰드리긴 힘든데, 최선을 다하고 있고요. 시드니 과장님 오면 말씀드려볼게요. 네네. 어 과장님 오셨어요. 전화기를 넘겨 받으니 낭랑함을 가장한 곡소리가 들린다. 법인에 나가있는 후배는 본사실적으로 인한 밀어내기로 힘들다고 이대로 있다가는 본인도 버티기 힘들다는 귀여운 협박(?) 중이었다. 재고부담을 안 주는 걸로 어르고 달래서 이번달 물량까지 맞추기로 하고 전화를 끊고, 잠시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어떤 사실 하나와 마주했다.

뭐야, 왜 죄다 후배들이지? 선배들 다 어디 갔냐.      


회사후배들이 날 부르는 별명 중 하나가 '성급한 책임충'이다. 성격이 급한 책임충 선배, 즉 책임감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것. 그 별명을 들을 때마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샘솟았다. 책임감 넘치는 사람들의 삶은 고달프니까. 대충 무책임하게 둘러대고 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타고난 성향은 거스를 수 없었다.     


게다가 바로 그날 혼신을 다해 썼던 글쓰기 공모전 탈락소식이 들려왔다. xx문학상이었는데, 2년 동안 썼던 단편소설을 틈틈이 퇴고해서 낸 열정과 혼신이 담긴 글이었다.


그래, 무슨 글이야. 당분간 일이나 하자. 아, 근데 날 또 떨어트리다니. 진짜 내가 절필한다 절필!!


이런 쪼잔하고 삐진 마음으로 팀장을 시작했다.





일단 뭐든 책으로 먼저 배우는 편이라, SBS 스페셜 제작팀이 낸 <리더의 조건>을 읽었다. 거기서 언급된 리더의 조건은 5가지 였다.

1. 직원의 가능성을 믿는다
2. 구성원을 행복하게 만든다
3. 소통하는 리더가 된다 
4. 특권의식을 버린다
5.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한다 

능력, 역량, 도덕적인 이야기가 많을 줄 알았는데, 위대한 리더들은 직원들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동료들과 친하게 잘 지내고는 있었지만, 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돌아봤다. 일단 구성원들이 회사에서 머무는 시간이라도 행복하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작 3명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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