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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Dec 04. 2023

[팀장]이 빨리 된 이유

이구역의 미친팀장



다 도망가고
다 날아갔다





같은 본부에서 뜨겁게 근무하다 한직으로 물러난 Y과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오기 전 우리 파트에서 가장 오랫동안 근무했었고 업무처리 능력이 좋았던 선배라 일단 생각나는 사람이 그 사람이었다. 간단한 안부인사를 나누다가 혹시 이전에 가지고 있던 자료가 있냐고 물었다. Y과장은 본사에서 지역본부로 옮기면서 자료를 전부 후임자에게 넘겨줬다고 했다.어색한 감사인사를 전하고 후임자 C과장에게 연락했다. 그에게도 간단한 안부인사 후 자료 남은 걸 요청했더니 Y과장이 전해준 외장하드를 통째로 분실해버렸다고 한다. 전화를 끊고 한동안 허탈감이 몰려왔다. 그럼 다시, 정리를 해야하는 건가.       


빈 폴더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급속한 인사이동과 후처리로 시스템에 올라온 자료 외에는 알수 있는 데이터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웃룩을 열어 ‘일본’을 쳤다. 그랬더니 수백가지의 자료가 나온다. 저 검색어로는 원하는 정보가 나올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히스토리’리고 쳐봤다. 내가 가장 알고 싶은 건 우리 파트의 히스토리였다. 언제 어떻게 진행이 되었고 왜 지금같은 상황이 벌어졌는지 맥락이 궁금했다. 다행히 2013년 정도 받았던 메일 중에 해외파트 전체 히스토리가 정리된 파일이 보였다. 비록 10년 전 정보라 업데이트는 필요했지만 뭐든 과거를 추적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면 모아야했다.     


자료는 없지만 사람들은 있었다. 남아있는 전임자, 전전임자를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했다. A수입상과는 왜 관계가 안 좋았는지, B수입상은 왜 제조처심사에서 탈락했는지, C담당자는 왜 징계를 받았는지, D담당자는 어떻게 포상을 받았는지 등등 <역사란 무엇인가>를 저술한 E.H 카의 심정으로 하나씩 기록했다. 2020년 정도까지 기록을 한 후 한번 내용을 훑어봤다. 농담으로 역사서라고 했지만 사실이 기술된 역사서를 넘어서는 스펙타클 대서사시였다. 중국이라면 삼국지였고 서양이라면 그리스로마신화 같은 느낌이랄까. 웬만한 정신력으로는 버티기 힘든, 많은 상황과 우여곡절들이 담겨있었다.      


그 중에는 내가 등장하는 부분도 있었다. 정말 힘들었던 시절. 말도 안되게 황당한 일만 벌어지던 시절. 아득한 시절이 생각나서 감상에 잠기기는커녕 아찔하기만 했다. 다시 돌아간다면 절대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들.      


머리를 도리도리하며 진절머리를 치는데, 메신저와 카톡으로 팀장승진 축하 메시지가 온다. 평균적으로 봤을 때 연차와 입사년도에 비해 팀장이 빨리 된 편이었다. 사실 우리 동기들에 비하면 나는 탁월하지도 않고 어른들에게 예쁨 받을만한 의전기능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책을 받은 이유는 하나다.     


도망가지 않아서. 모두가 도망갈 때 나는 그냥 남아있었다.           


그럼 나는 왜 이곳에 남아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모두가 도망가면 같이 도망을 가야하는데, 왜 비바람이 몰아치는 사막에 혼자 우두커니 서있었을까.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배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직장생활을 10년 넘게 하면서 하루도 뭔가를 배우지 않은 날이 없었다. 단 하루도 루틴한 날이 없었고, 매일 예상치 못한 것들을 마주한다. 상황 속에서 액션으로 배우고 (전문용어로 액션러닝)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무언가가 좋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 회사에서 지금 우리파트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였다. 무섭게도 그랬다.



부담감과 압박감에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어떡하지? 두려움이 눈 앞을 가린다. 일단 이럴 땐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정리해야했다. 일단 과거 히스토리 정리를 했다. 히스토리를 알면 성공의 공식은 몰라도 실패의 방식은 알수 있다. 가능한 과거 선배들이 했던 실패방식은 택하지 않으리. 성공의방법은 실패 가능성을 줄여가면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며칠 동안 자료를 정리하고 숨 좀 쉬는데, 관리부서에서 호출을 한다. 예상되는 질문은 뻔했다. 왜 현재 이것밖에 안되는 거냐, 어떻게 할 거냐. “팀장 된지 일주일 밖에 안되서요. 잘 모르겠어요. 좀 봐주세요.”라고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상대방의 태도가 어그러지고 있어서 웃음기를 최대한 빼고 있었다. 결국 상대는 우리 파트에 대한 비방과 우리 본부에 대한 폄하를 이어갔다. 더 들어줄까 하다가 시간이 아까운 것 같아 상대의 말을 끊었다.     


“다 말씀 하신거죠? 그럼 저도 질문을 좀 하겠습니다.”     


대화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일방적으로 내 말만 하기,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기, 웃음으로 일단 분위기를 띄우기, 기선제압을 위해 화내기 등. 어떤 걸 선택할지 고민하다가 이런 상황에서는 상대방의 비논리성을 자각시키는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이 낫다고 판단했다.      


“관리부서는 효율을 중시하는 부서가 맞습니까?”

“효율이 중요하면 가장 빠른 시간에 매출을 하는 게 중요한거 맞습니까?”

“하신 말씀 중에 저희 파트에 적용될수 있는 인사이트가 있습니까?”

“대안없는 비판을 많이 하신 것 같은데, 그 말에 원칙은 있습니까?”      


앞 사람들 얼굴이 점점 사색이 된다. 거의 이구역의 미친x을 쳐다보는 눈빛이다. 어쩔 수 없다. 내가 100% 만든 사업은 아니지만 발령이 난 이후부터는 우리 파트와 우리 사람들을 보호해야하는 책무가 있었다. 공격을 하는데 맞고만 있을 수 없었다. 내가 맞고 들어가면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사기가 떨어지니까. 눈을 감고 한참 내 말을 듣던 상대는 한숨을 쉬며 말한다.


“시드니님은 이 사업에 애정이 강하시군요.”

“안 그런 사람 있습니까? 안그래요?(찌릿).”     


그 후 한동안 관리부서에서 호출은 없었다. 성격이 지랄맞다는 판단도 있을 거고 애정과 책임이 있는 사람이 이상한 결정은 안 할거라고 믿어줬을 수도 있다. 부디 후자였길 바라며. 진짜 팀장의 일을 시작했다.


지역지사로 간 Y선배와의 대화

나: 선배님, 거기 좋아요?
Y : 진짜 이런 세상이 있을지 몰랐어. 넘 좋아.
나: 다시 오실 생각은 없으시죠.
Y : 재수없는 소리 마라. 여기서 조용히 살게.
나: 네... 전화하면 받아주세요.
Y : 일 관련된 걸로는 하지말고. 화이팅!



예전에 브런치에 썼던 인사발령 글.

상황은 다르지만, 항상 비슷한 상태였던 것 같다.

https://brunch.co.kr/@sydney/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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