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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Dec 18. 2023

[일] 사나운 할배들과 5시간

귀여운 할배들 같으니라고



전청조를 만났는데,
내가 전청조였다면?


  

           

영민한 할배들은 우리 얼굴을 보자마자 쉴새 없이 불만을 쏟아냈다. 이미 연초에 (날치기로 말도 안 되는 요율로) 결정된 가격인상을 왜 번복하느냐, 우리가 너네랑 사업하면서 얼마나 많이 힘들었는지 아느냐. (돈은 엄청 버셨지만) 30년간 우리와 사업하면서 겪었던 풍파에 대해 쏟아냈고 실장님과 나, J팀장은 가만히 그들의 날 선 비난을 듣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세음절만 맴돌고 있었다. 바로 ‘사기꾼’. 이 협상에 오기 전에 전임자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는데, 대체적으로 이 할배들에 대한 여론은 ‘사기꾼’이었다. 매번 말을 바꾸고 매번 우는 소리를 해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담당자가 나타나면 연락두절 되어버렸다가 다시 새로운 사람이 바뀌면 그제야 연락을 해오는 할배들.      


가만히 듣다 보니 슬슬 열이 받았다. 메모지를 열어 ‘실장님, 한 말씀하시는 게 어때요?’라고 적었다. 내 메모를 본 실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할배들의 성토대회가 클라이맥스에 달하고 잠시 정적이 찾아오자, 실장은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입을 열었다.     


“오늘 비가 옵니다. 한국에서는 비가 오는 날 이사를 하거나 결혼을 하면 잘 산다고 합니다. 비는 가끔 찾아오는 행운을 의미하지요. 또 한국 속담에는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동안 고생하셨던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오랜 시간 저희 사업에 힘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양사가 사업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이견이 있는 상황인데, 저는 우리가 상생하는 방향으로 풀어가고 싶습니다. “     


평소 빙빙 돌려서 말하기보다는 직설적으로 거침없이 의견을 내는 그인지라 잠시 당황했다. 일단 나는 그의 말을 통역했다. 속으로 ‘사기꾼’이라는 단어만 새기고 있었는데, 실장님의 온화한 단어를 통역하다 보니 나도 뭔가 마음이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예상치 못한 부드러운 멘트가 나와서 그런지, 뭔가 할배들도 흥분을 가라앉힌 느낌이다.     


“에헴!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요.”

“저희는 00%의 가격인상을 원합니다.”
 “절대 안 됩니다!”     


다시 신경질 모드로 돌아간 할배들. 실장님이 잠깐 입술이 이죽이는 걸 봤지만 못 본 척했다. (역시 타고난 성격은 감출 수가 없다.)      


“이번 협상을 실패하면, 저와 여기 있는 실무자들은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럼 다음 실무자가 올 거고 계속 같은 상황이 반복되겠죠. 저는 해외사업만 20년을 한 전문가입니다. 저를 아신지 얼마 안 되셨지만 저는 M사와 사업을 잘 이끌어 상생할 자신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J팀장, 남팀장 모두 젊고 유능한 팀장들입니다. 저희와 협상을 하지 못한다면, 누구랑 할 수 있을까요. 저희와 함께 가격인상을 하고, 앞으로 사업에 대해 발전적인 이야기를 하시죠.”      


부드러운 협박이었다. 지금 최선의 멤버(?)가 왔는데, 여기서도 계속 각을 세우면 앞으로 M사 할배들도 장밋빛 미래만 볼 순 없을 거다. 단호하던 할배들의 동공이 흔들린다. 그러더니 잠시 나가서 이야기를 하고 오겠다고 할배들이 나갔다 온다. 한참있다 들어온 할배들은 우리의 요구에 한참 못 미치는 xx%를 제시한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할배들은 xx%가 아니면 죽어도 안 된다고 한다. 우리 쪽도 단호했다. 00%를 올리지 않으면 여기에 온 의미가 없었다. 몇 분의 침묵이 흐른 뒤, 할배들은 이번엔 밖에 나가지 않고 테이블 위에서 대화를 한다. 가만히 들어보니 두 할배 의견이 다르다. 한 명은 그냥 받아주자, 한 명은 여전히 반대입장이다. 나는 가만히 그 둘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발 받아주자는 사람이 이겼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멍때리고 있는데, 반대입장을 내던 할배가 나에게 말을 건다. 자기가 지금부터 말하는 건 실장통역을 하지 말아 달라고 한다. 뭔 소리를 하려고 이렇게 소곤거리는지 불쾌했지만, 일단 말해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진짜 00%만 올려주면 되는 거냐고 묻는다. 그 후에 번복하면, 어떻게 할거냐고 따져 물었다.   

    

그때 스치듯 ’합의서‘가 생각났다. 과거 중요한 협상이 끝날 때마다 양사의 의견을 확인하는  합의서를 체결하곤 했다. 특히 내가 마케팅부서 과장일 때 조사업체들과 계약 일정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부속합의서를 가끔 체결하곤 했다. 화난 할배의 풀네임을 부르며, 우리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면 계약서에 준하는 합의서를 체결할 의사도 있다고 했다. 실제 내가 시뮬레이션 돌린 결과 00%만 인상하면 성공이었으니까. 00%가 적힌 합의서라면 도장이든 싸인이든 엉덩이로 이름 쓰기든 뭐든 해줄 수 있었다. 할배가 다시 묻는다.     

 

“시드니 팀장 이름도 적습니다.”

“두 번, 세 번, 아니 열 번도 더 적으세요.”     


꼭 합의서 덕은 아니겠지만 그 뒤로 협의가 급물살을 탔다. 물 흐르듯 협의가 끝났고 결과적으로 목표한 인상률 보다 더 높은 요율을 얻어냈다. 무엇이 할배들의 마음을 열었는지 모르겠다. 실장님의 부드러운 예의와 내가 준 확신, 그리고 전임자들 없이 새로운 사람들이 나와서 회의를 끌어갔던 것. 많은 요소들의 화학작용으로 목표한 결과를 냈다. 시계를 보니 5시간이 흘러있었다. 통역을 너무 많이 했더니 볼이 아팠다.


사무실 1층으로 내려와 할배들을 배웅하는데, 아까 소곤거렸던 할배가 가던 길을 돌아서서 나에게 오더니 이렇게 말한다.


“다음에 언제 또 오시나요? 그땐 식사를 융숭히 대접하고 싶습니다.”


결국 할배들에게 필요한 건 믿음이었던 것 같다. 믿음이 없으니 의심하고 화를 내고 불안했던 게 아닐까. 따뜻한 미소를 짓고 떠나가는 할배들의 하얗게 센 뒤통수를 보며 문득, 내 머리도 하얘졌다. 저 할배들이 진짜 사기꾼일까? 아니면 우유부단하고 상대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이쪽이 사기꾼이 아니었나.    

  


공을 던졌는데 내가 공을 맞는다. 3차원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다른 차원이면 가능하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버리니 머리를 뎅-하고 맞은 기분이 든다. 가족이나 연인끼리 싸울 때도 꼭 한쪽의 귀책이 없듯이 오랜 기간 사업을 해온 관계에서 한쪽만 사기꾼이었을 리가 없다.       


할배들을 태운 차량이 사라졌을 때, 실장님에게 조심하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실장님은 이게 뭐냐는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하..하이파이브... 너털웃음으로 하이파이브를 해주던 실장님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났다.      


“시드니, 그나저나 다음 거 해야지?”

“다... 음꺼요? (방금 협상 끝났는데...)”

“응. C사. 거기 내년물량 협의해야지.”     


이번 출장에서 협상을 해야 하는 거래처가 하나 더 있었다. 미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대기업으로, 유연성이 0에 수렴하는 C사와 내년 물량협의를 해야 했다. 무언가를 요청을 할 때마다 물건을 빼버리겠다는 협박(?)을 일삼는 힘이 센 공룡 유통사. 을이 될 수밖에 없는 제조사 입장에서 상당히 어려운 상대였다. 포타겔로 평화로웠던 뱃속에서 다시 천둥이 우르르 쾅쾅 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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