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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예희 Feb 20. 2017

평일의 애프터눈 티에 대하여

애프터눈 티를 좋아한다. 2단 트레이에 꾸역꾸역 담아주는 곳도 있지만 이왕이면 3단이었음 좋겠다. 강호의 도의가 땅에 또로롱 떨어지기 전에는 3단이 진리다. 맛도 중요하지만 인증샷을 예쁘게 찍어야 하지 않것습니까. 물론 티팟과 홍찻잔도 예뻐야 한다. 예쁜 게 좋다. 오늘을 위해 컨실러를 빡세게 발랐다. 애프터눈 티는 평일 낮, 점심밥 대신 먹는다. 둘이서 우적우적 3단 접시를 깨끗이 비운다. 손가락 끝으로 우아를 떨며 얌전히 샌드위치든 스콘이든 뭐든 살포시 집어 들어 입술을 살짝 벌려 아앙 하고 베어 물고 싶지만 현실은 호호... 뭐든 집었다 하면 한입에 다 들어갑니다. '새처럼 조금 먹는다'는 표현이 있던데 나의 경우는 그 새가 펠리컨이고요... 하여간 한가한 평일 낮에 이러고 있으면 기분이 가로 세로로 뜯어지고 째진다. 


나의 애프터눈 티 파트너 역시 프리랜서다. 나는 집에서 일하고 그는 정해진 날에 출근해 일한다. 나의 마감과 마감 사이, 그의 출근과 출근 사이 한줄기 빛처럼 반짝이는 날을 확 잡아 피 같은 자체 월차를 쓰고 아리땁고 달달한 것을 잔뜩 먹는 것이다. 음식이 나오면 잠깐, 잠깐, 잠깐을 외치며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정면, 측면, 그리고 트레이 위의 둥근 접시들을 하나씩 홰까닥 돌려 반대쪽 자태도 담는다. 옆에 따로 나온 잼과 버터, 클로티드 크림(요걸 내놓는 곳은 많지 않다)도 한 장 찍는다. 자 따라봐. 차 한잔 따라봐 하며 여리여리하게 생긴 찻잔에다 반짝거리는 스트레이너를 척 걸쳐놓고 붉은 빛깔 홍차를 쪼르륵 따르라고 주문한 후 사진을 찍는다. 이번엔 나, 나도 찍어줘. 드넓은 어깨를 한껏 도르르 말듯이 움츠려 최선을 다해 가냘픈 실루엣(은 개뿔)을 만들고 새끼손가락은 편 채 나머지 손가락으로만 티팟을 들어 올려(드럽게 무겁다) 찻잔에 홍차를 따른다. 찍었어? 잘 나왔어? 눈 감았어? 확인을 마치고 나면 와하핳 웃으며 음식에 달려든다. 그 사이 샌드위치 겉이 말라버렸고 스콘은 다 식었지만 괜찮아요. 사진이 남았으니까요. 


일단 밥 되는 것부터 먹고 단거 먹어야지. 샌드위치를 입에 우겨넣고 우물우물하며 사진들을 홱홱 넘기다 이거다 하며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곧 하트가 콕콕 찍히고 댓글이 달린다. 여긴 어디야, 좋겠다, 나도 갈래, 진짜 부럽다, 나는 회산데. 그래 이것들아 부러워해라. 내가 어! 평일에 어! 이러고 놀려고 어! 오늘 하루를 빼려고 빡시게 일을 했다고 어! 니네가 나의 고통을 알긋냐! 나는 열심히 일했으며 오늘 하루 자체 월차를 쓸 자격이 있다. 나의 관대하신 사장님(은 바로 나)께서 친히 무급 월차를 주셨다. 우리 사장님께선 마음만 먹으면 영원히 무급 월차를 주실 수도 있는 분이다. 내가 일해서 내가 돈 벌어서 내가 놀겠다는데 뭐 어쩌라고. 그런데 이상하지, 그게 괜히 민망하고 그게 괜히 송구할 때가 있었다. 대체 누구한테 뭐가 그리 부끄럽고 죄송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재밌어도 재밌는 티 내면 욕먹겠지 싶어 자체 검열을 하며 찌그러졌던 때가 있었다 이겁니다. 긴긴 변명, 정말 드럽게 긴 변명을 했었다. 나이 먹은 덕분인지 아니면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서 상당히 자유로와졌다. 인간은 남에게 그렇게까지 관심을 가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느끼면서다. 


그러고 보면 마지막으로 봤던 사주, 고게 상당히 용했단 말이지. 꽤 오래전 그러니까 학교를 갓 졸업했을 때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딱히 사주며 점을 보러 다니질 않지만(싫은 건 아닌데 흥미도 없다) 나 대신 부모님께서 자식들 생년월일시를 쫙 적어 갖고 가셔서 이런저런 이야길 잔뜩 들어오셨다. 그리하여 나의 팔자는 뭔 팔자였느냐. 아 글쎄 강남 사모님 팔자라는 것인데 그게 뭔 소리냐면 남들 일할 때 미용실 다니고 백화점 다니고 할 거라는 얘깁니다. 아 그려요? 고거 되게 달달한데? 그러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문득 깨달았으니, 그렇구나 나는 내 돈으로 평일에 머리도 다듬고 쇼핑도 하고 있구나 왜냐하면 프리랜서라 평일에 시간이 되니까 그런 거구나. 그분의 사주풀이는 살짝 핀트가 나가긴 했지만 호호 신기하긴 신기합니다. 내 앞에 앉아 마카롱을 냠냠 먹는 나의 애프터눈 티 파트너에게 묻는다. "우리 되게 할 일 없어 보이겠지?" 그는 심리치료사다. 얘기를 끈기 있게 잘 들어주고 얘기를 기막히게 잘 이끌어낸다. 만나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 보면 어느새 어이구야 내가 별소리를 다 하고 있네 싶게 속을 탈탈 털리곤 한다. "아 됐어. 무슨 상관이야. 마카롱 맛있네." 왠지 위안이 되는 대답이다. 애프터눈 티의 마무리는 언제나 매운 것이다. 맛있어, 예뻐, 달아, 근데 너무 달다, 떡볶이 땡기지 않니. 은광여고 앞에 떡볶이 맛있는 집 있는데. 아님 쫄면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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