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으로 먹고살기
매월 10일. 매월 15일. 매월 30일. 혹은 인보이스 제출일로부터 45일.
회사마다 대금 지급일이 달라 늘 헷갈린다. 오늘 입금된 돈이 지난달 작업분인가? 지지난달 건가? 그럼 이건 몇 월의 수입으로 쳐야 하지? 굳이 구분할 필요 없나? 나는 지금도 내가 한 달간 어느 정도의 값을 하며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매달 계좌에 입금되는 금액을 기록해 나름의 월급명세서를 만들곤 했는데 그마저도 관뒀다(월말-월초 구간이 바쁘다는 사정이 있다). 그래도 이제는 ‘이달 말엔 얼마 정도 받겠구나’ 라고 어렴풋이 예측 가능한 경지에 올랐다. 인보이스를 제출할 때 자연스레 금액을 보면서 다음 달 생활비가 어느 정도 마련될지 자동으로 계산을 하기 때문이다. 많이 부족하면 작업 의뢰를 거절할 여유 따위는 사라진다. 무조건 예스를 외쳐야 한다. 먼저 본 사람이 일을 챙겨가는 선착순 시스템으로 작업할 때는 조금 더 작정하고 새로고침 버튼을 누른다. 나는 배고프면 무척 예민해지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6년 차라는 타이틀을 달게 된 2022년 4월. 드디어 목표 월급을 달성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목표 월급이란 ‘번역만으로 한 달에 이 정도씩 꾸준히 벌고 살면 좋겠다’라는 마음을 숫자로 정해둔 것을 뜻한다. 말일로 갈수록 계좌에 입금되는 실제 금액을 눈으로 확인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맙소사. 내가 해냈구나. 진짜로 번역으로 먹고살고 있구나. 맙소사.
내가 설정한 금액은 누군가에겐 코웃음 나는 수준일 거다. 또 누군가에겐 풍족하고, 누군가에겐 그저 그렇고, 누군가에겐 부족할 것이다. 이 숫자는 한여름 밤의 꿈일 수도 있고 이제부터 함께할 클래식 넘버가 될 수도 있다. 왜 내가 이 사실에 큰 의미를 두며 이렇게 거창히 글까지 쓰고 있냐면, 프리랜서의 수입이란 오늘 다르고 내일 또 달라서 목표 금액이 작든 크든 그것을 달성했다는 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1년 차 번역가 시절, 나는 내가 정말 영어를 한국어로 옮기면서 먹고 살 수 있을지 ‘생존’의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 3천 원짜리 아메리카노 한 잔 사 마시는 일조차 자제해야 했고, 예상에서 벗어난 커피 데이트나 외식 약속이 잡히면 오늘 저녁으로 먹고 싶었던 떡볶이를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했다. 오늘 떡볶이 사 먹을 돈을 아껴야 지인들과의 모임에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밥을 산다거나 커피 정도는 쏘겠다는 말을 하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더불어 목표 월급을 6년 차에야 달성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래 내 월급만 빼고 모든 게 오른다고는 하지만 번역 단가는 더더욱 꿈쩍 앉는 듯하다. 최저 시급은 매년 오르는데 번역료는 1년에 단어당 10원 올리기도 어렵다. 힘들게 3-5원 올렸더니 한 업체에서는 한동안 번역을 의뢰하지 않기도 했다. 당시엔 타이밍의 문제였을 것이라 넘겼지만 지금까지도 찜찜하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해외업체의 번역가 구인 메일에 MT 단가가 0.010 USD(약 12원 수준)로 표기된 것을 보고 경악을 했다. 무슨 배짱으로 메일을 보낸 건지 지금도 이해가 안 간다. 부디 그 이메일에 답장한 번역가가 한 명도 없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자정이 지나고 다음 달이 되면 나의 사랑스러운 월급은 제로(0)가 된다. 일사불란하게 후루룩 자동이체 될 예정이니까. 게다가 말 그대로 월급이니 새로운 달과는 상관이 없다. 다시 일을 열심히 해서 실적을 쌓아야 목표치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달에 이렇게 받았다고 다음 달에도 받을 거란 보장은 없다. 그냥 제로. 다시 시작이다.
분명한 것은, 나는 목표 월급을 받을 만큼 정말 열심히 일했다. 지난달뿐 아니라 오랜 기간―5년에 걸쳐―열심히 일했다. 또 그동안 고맙게도 거래처들이 나를 찾아 주었다. 어차피 돈 받고 하는 일이라지만 나는 정성을 다해 내 어깨와 손목과 시력과 허리를 바쳐 고마움을 표시했다. 뭐, 괴롭기도 했지만 기꺼운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 번역으로 먹고살 수 있다는 사실이 기분 좋고, 기쁘고,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목표 금액을 달성한 것이 뿌듯한 이유는 비단 평소보다 많이 받아서가 아니라 지나간 세월에 대한 보답을 얻은 것 같아서 일 테다.
감사히 지불받은 대가를 이대로 묻어두자니 약간 아쉬운 기분이다. 좋은 무언가를 나 자신에게 선물해볼까 싶다.
P.S. 그러고 보니 이 글의 제목은 ‘6년 차가 되고서야 목표 월급 이상을 받았다’가 되는 것이 맞다. 계산해보니 이번 달에는 목표 금액보다 50만 원이나 더 번 상태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냐고? 정확히 50만 원이 다음 달로 밀렸다. 입금이 덜 된 것 같아 업체에 확인 요청을 했더니 매니저가 회계팀에 금액을 누락해서 넘겼단다. 안 주실 거 아니니 괜찮다고 웃으며 마무리 지었다. 아, 잔뜩 우쭐해지고 싶었는데. 어깨에 너무 힘을 넣었나. 어깨도 모자라 목과 턱에도 힘을 빡 주려던 내 모습을 보고, 하늘이 겸손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아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P.S. 얼마 받았냐, 얼마를 받고 있냐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