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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이 Jun 16. 2022

첫 번역서 출간을 앞두고

‘옮긴이’의 삶 속으로

‘어제 인쇄소에 파일 넘겼고요, 변동 사항만 없다면 다음 주에 입고될 예정입니다.’



쿵쾅쿵쾅. 그렇구나. 쿵쾅쿵쾅. 근데 괜찮은 건가. 쿵쾅쿵쾅. 입고가 된다고… 문제없는 건가. 쿵쾅쿵쾅. 드디어 세상에 나온다니 좋긴 한데 이거, 괜찮은 건가. 쿵쾅쿵쾅.



가라앉을 기미가 없어 보이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끼며 가슴을 부여잡고 심호흡을 해본다. 이건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떨림과 흥분이다. 나이와 연차가 더해질수록 삶에는 신나는 일보다 권태로운 순간이 늘어난다. 어느 연예인은 방송에서 ‘이 나이가 되어서도 처음 해보는 일이 있다니 무척 신이 난다’고 말했다. 삶에서든 직업에서든, 좋든 싫든 미드레벨(Mid-level)에 진입하고 있는 시기라면, 이제는 처음 해보는 일이 많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새로운 도전을 해보겠다고 나서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건 나쁘지 않고, 저건 별로라는 직감이 강해질 뿐. 성장을 하고 연륜이 쌓이는 거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마저도 탐탁지 않게 느껴질 땐 자기 자신과 환경을 향한 냉소적 시선을 거두기가 어렵다. 그런데, 다음 주에 나의 첫 번역서가 나온단다.


작가는 작품과 계절을 함께한다. 내가 직접 지은 책들을 보고 있으면 이 말에 더욱 깊이 공감한다. 작년에는 책을 세 권 만들었는데, 하나는 늦겨울에서 완연한 봄까지, 또 다른 하나는 한여름에서 가을까지, 나머지 하나는 늦가을에서 초겨울까지 함께했다. 책을 보면 이것을 만드느라 애썼던 계절의 공기와 색깔, 냄새가 떠오른다. 뒤이어 묵혀둔 감정이 떠오르고, 쥐고 있던 펜을 잠시 내려놓는다.


책을 번역하고 싶다고, 꼭 그래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랐던 것은 번역을 시작할 때부터였다. 지금은 초보 단가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고 있지만 언젠가는 내가 반드시 우뚝 서서 부모 앞에선 어깨 활짝 펴고 지인들 앞에선 자랑스럽다는 시선 듬뿍 받으며 살리라. 야심과 투지를 불태웠던 나날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 번역서는 5년 동안의 바람이 실현된 것, 즉 5년이나 걸려 번역된 책인 셈이다. 한 권을 번역하기까지 5년. 밑져도 한참 밑진 장사다. 그런데도 ‘옮긴이’라며 책 표지 한쪽을 당당히 차지한 내 이름과 짤막한 소개 글을 보니 아무래도 괜찮은 것 같다—괜찮아도 되는 건가? 여러 번 봐도 똑같은 책 사진이 뭐 그렇게 신기하다고, 온라인 서점 웹사이트에 적힌 내 이름이 내일이면 없을 것처럼 보고 또 본다. 이 소식을 전해줄 사람이 더 이상 없던가? 아냐, 그럴 리가. 연락처를 뒤적인다… 몇 분 뒤, 머쓱하게 책상으로 돌아가 하던 일이나 다시 하기로 한다.(참고로 책을 번역하는 데는 휴가 기간까지 포함해 약 3개월 반이 걸렸다).


내가 직접 쓴 글은 아닐지라도 손수 작성한다는 마음으로 옮겼고, 함께한 여성 번역가 동료들의 글에 매끄럽게 녹아들어야 한다는 비장한 생각으로 작업에 임했다. ‘같이’함에서 큰 자부심과 기쁨을 느꼈다. 힘들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힘듦보다 성장을 얻었다는 것(문법적으로 안 맞지만 이 표현이 제일 적당한 기분이다). 누구에게나 처음의 기억은 강렬하다. 좋아서 그럴 수도 있고, 잊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다. 나의 첫 번역서에는 이 두 가지 감정이 모두 담겨 있다. 나의 바람이 실현됐을 뿐 아니라 멋진 책을 멋진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서. 그리고 이 책과 함께했던 작년의 더운 계절에 불안, 염려, 걱정 때문에 유독 힘들어했었기 때문에. 잘하고 싶어서 열정을 불태웠지만 때로는 열정이라는 덫에 걸려 괴로워하고 소진되었던 순간들이 문장 곳곳에 담겨 있으니까.


지금의 두근거림이 부디 오래 이어졌으면 좋겠다. 첫 번역서가 내게 주는, 유일무이한 이 감정을 희미해질 때까지 맡고 또 맡을 테다.

하나의 계절로 기억될 책이 한 권 더 늘어서, 행복하다.


실제로 작업할 때 마셨던 커피 사진이 있길래…



http://aladin.kr/p/ePG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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