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어 Nov 10. 2021

밥그릇은 잘못 없다

- 무능력의 연좌제, 무능력의 희생양

살면서 경찰서와 법원, 병원은 안 가는 게 좋다는데, 그곳보다 나는 은행에 가는 게 더 부담스럽다.


프리랜서라 신용 대출을 받는 게 무척 까다롭기 때문이다. 설령 대출을 신청한 게 승인 나더라도 소액에 고금리다.


그동안 백수 생활을 할 때마다 대출을 받으려고 은행에 몇 번 간 적이 있다. 백수 신분으로 은행에 갈 때는 왠지 몸이 움츠러들고, 발걸음이 무겁다.


주민 센터와 세무서에 가서 대출 심사에 필요한 서류를 발급받는 것쯤은 전혀 귀찮거나 번거롭지 않다. 은행에 가서 대출 담당 직원에게 서류를 건넨 다음부터가 고달프다.     


그때부터 겸연쩍고, 지루한 상황이 시작된다. 돈 맡겨 놓은 것을 달라는 게 아니고, 돈을 빌려달라는 것이니 심리적으로 위축이 된다. 행여나 대출이 안 된다고 할까 봐 초조하면서 조바심도 난다.


은행 직원이 서류를 한 장, 한 장 살펴볼 때, 그 종이가 마치 반성문처럼 보여서 학창 시절에 교무실로 불려 간 기억도 떠오른다. 




그 순간, '대체 무슨 생각과 배짱으로 결혼한 걸까', '능력도 없는 주제에 왜 딸까지 낳았을까', '왜 예체능까지 시켰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그렇게 이성이 모질게 몰아세우면 감성은 미련하게 모두 받아들인다. 그 덤터기를 써서 기분이 우중충해진다.


힘없이 집으로 돌아와서 혼자 밥을 먹는데, 밥그릇에 금이 가있다! 밥그릇이 처량한 나의 신세처럼 보인다.

      

다음 날, 아내가 밥그릇을 사 왔다. 사기 밥그릇이지만 짱짱해 보인다.


밥그릇에 밥을 수북이 담아준다. 얼큰하게 끓인 김치찌개와 두툼한 계란말이가 식욕을 돋운다.


김치찌개에 담긴 돼지고기가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살코기와 비계에서 윤기가 난다.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자 흥이 난다.     


왜 모를까. 기를 살려주려고 아내가 식탁에 정성을 들였다는 걸... 밥 한 그릇을 비우고 나자 기운이 난다. 왠지 이력서를 보낸 곳에서 연락이 올 것만 같다.




- “무능력은 ‘현재’이지 ‘미래’가 아니다. 밥그릇에는 ‘밥’만 담겨있는 게 아니라, ‘희망’도 담겨있다”


작가의 이전글 활어처럼 팔딱팔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