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인의 초능력 I
대학원 후배의 이야기. 심리학과엔 전공 특성상 소심인이 많은데 그녀는 유독 기억에 남아 있다. 작은 체구, 쪽찐 머리, 핏기 없는 하얀 피부, 표정 변화가 적은 얼굴, 거의 열리지 않는 입, 그리고 어딘가 느린 동작이 전반적인 모습이었다.
이따금 입을 열면 그 목소리가 참 작고 얇다. 음식점에서 점원을 부르려면 그녀가 가진 하루치 에너지를 모두 써야 할 것 같았다. 조금만 당황해도 얼굴엔 붉은 노을이 물들고 호흡이 가빠진다. 누군가 나에게 '그래서 소심인의 전형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그녀가 떠오를 것 같다. 얇은 테의 안경을 쓰곤 했는데, 안경을 비롯한 단아한 느낌 때문인지 연구소 내에서 그녀의 별명은 '안선생'이었다.
안선생에 대한 가장 인상 깊은 기억은 소리에 대한 예민함이다. 대화를 하거나 뭔가 집중할 때, 혹은 가만히 멍을 때릴 때, 특정 수준 이상의 큰 소리가 나면 그녀의 말이나 행동은 끊긴다. 그 소리에 놀라 그대로 전원이 꺼진 로봇처럼 정지 상태가 되는 것이다.
한번은 길을 걷고 있었는데 좁은 길가로 오토바이 무리가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멀리서부터 소리를 내지 않았기에 미처 대비하지 못했다. 나는 악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떨어진 심장을 줍다가 문득 같이 걷던 그녀를 살폈다. 그녀도 나와 마찬가지로 정지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두 뺨으로 뭔가 흘러내린다. 너무 많이 놀라면 눈물이 주룩 흐른다고 한다.
인류의 15~20%는 자극에 매우 민감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심리학자 엘레인 아론Elaine N. Aron은 이와 같은 사람들을 HSP(Highly Sensitive Person)라는 용어로 개념화하였고, DOES 모델로 그들의 네 가지 특징을 정의하였다.
Depth of processing: 깊이 있는 정보 처리
경험과 정보를 깊게 생각하고 분석하며, 결정을 내릴 때 신중하고 심사숙고한다.
Overstimulation: 쉽게 과자극을 느낌
복잡하고 강렬하거나 오래 지속되는 상황에서 더 빨리 지친다.
소음, 사람 많은 곳, 밝은 빛, 복잡한 일정 등에 쉽게 지침을 느낀다.
Emotional reactivity & Empathy: 강한 감정 반응과 공감 능력
감정이 풍부하고 쉽게 감정 이입하며, 특히 긍정적인 자극에 더 강하게 반응한다.
영화나 음악, 예술 등에 깊이 감동받는다.
Sensitivity to subtle stimuli: 세밀한 자극에 대한 민감함
분위기 변화, 목소리의 억양, 타인의 기분 변화 등을 민감하게 알아차린다.
그가 설명한 네 가지 특징을 보면 내가 그런 기질에 얼마나 가까운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론 박사는 느낌적인 느낌만으로 '나도 HSP인 것 같아!'라고 오해할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 누구나 체크해 볼 수 있는 자가진단 테스트를 만들었다. 다음의 링크를 통해 내가 HSP에 해당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검사하기 링크]
※ 만약 링크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아래 내용을 통해 직접 체크해 볼 수도 있어요. :)
[HSP 자가진단 테스트 (수정된 HSP-R 척도)]
* 아래의 18개 질문에 대해 1~7점 사이의 점수를 메모해 주세요(1점: 전혀 그렇지 않다, 4점: 보통이다, 7점: 매우 그렇다). 답변이 끝난 후 점수의 평균을 구하세요.
질문
1. 주변 물건의 위치가 변경되었을 때 잘 알아차리는가?
2. 타인의 피드백(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에 쉽게 영향을 받는가?
3. 밝은 빛, 강한 냄새, 거친 천, 가까운 곳의 사이렌 소리 같은 것들에 쉽게 압도당하는가?
4.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쉽게 알아차리는가?
5. 섬세하거나 정교한 향기, 맛, 소리, 예술 작품을 알아차리고 즐기는가?
6. 주변 사람들의 기분에 쉽게 영향을 받는가?
7. 어떤 일이 생기면 여러 각도로 오래 생각해 보는 편인가?
8. 다른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기분이 어떨지 잘 예상하는가?
9. 큰 소음이나 혼란스러운 장면 등, 강렬한 자극에 방해받는가?
10. 겉으로 드러내든 그렇지 않든, 겪는 일들에 대체로 강하게 반응하는가?
11. 다른 사람들이 당신이 그들의 감정이나 생각을 잘 이해한다고 말하는가?
12. 음악에 깊이 몰입하는 경향이 있는가?
13. 인생의 의미, 존재의 이유 같은 철학적 주제에 대해 생각하는 편인가
14. 다른 사람들보다 날씨 변화를 더 잘 알아차리는가?
15. 주변에서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으면 불편하고 신경이 예민해지는가?
16. 예술이나 음악으로부터 깊이 감동받는가?
17. 계절이 바뀌는 작은 변화들을 알아차리는 경향이 있는가?
18. 깊은 대화를 좋아하는가?
결과
- 평균 점수가 5점 이상일 경우, HSP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HSP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사회에 던져지면 그들은 대체로 어려움을 겪는다. 작은 비판에도 상처를 받는 편인데 사회 자체가 평가의 연속인 곳이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갈등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그렇다고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생각으로만 사회생활을 할 수 없으니 이 역시 쉽지 않다. 심지어 일상을 가득 메운 자극들을 견뎌야 하므로 쉽게 지친다. 너무 많은 정보나 선택들이 다가오면 김을 뿜으며 고장나기도 한다.
다행히 장점도 있다. 예민함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적용된다. 타인의 기분이나 상태를 알아채기 쉬우니 공감 능력이 좋을 수밖에 없다. 타인을 잘 배려하고 세심하다. 예술적 감수성이 높다. 깊이 있는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
나열되는 특징들이 딱히 낯설지 않다. 흔히 거론되는 내향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HSP와 내향성은 어떤 관계인 걸까. 구분되는 개념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깊은 관련이 있다.
심리학자 융Carl Gustav Jung은 성격 특질의 하나로 내향-외향의 개념을 처음 부각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내향인은 정신적 에너지인 리비도가 내부로 흐르고, 외향인은 외부로 흐른다. 이러한 구분은 두 성향의 일상생활에서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정작 무엇 때문에 달라지는가에 대해서는 좀 더 설명이 필요했다.
그래서 영국 심리학자 한스 아이젱크Hans Eysenck는 '각성 이론'을 통해 두 성향의 차이를 실제 신체 반응의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내/외향이 구분되는 결정적인 차이를 '자극에 대한 반응성'으로 꼬집었는데, 이는 에너지의 흐름으로 이해하던 개념보다 좀 더 명확하게 내향인의 행동 패턴을 설명한다. 즉, 내향인들 대부분이 자극에 민감하다. 기질적으로 그렇게 유전되었다는 의미다.
후속 연구들이 이를 뒷받침했다. 가령 동일한 양의 레몬즙을 혀에 떨어뜨리자 내향인이 외향인에 비해 침의 분비량이 많았다. 피부 민감성 역시 내향인이 더 높았다. 시각 자극으로 인한 동공의 확장, 청각 자극에 대한 반응 등 신체 자극에 기반을 둔 수십여 개의 연구에서 동일한 결과가 나타났다.
내향성 자체가 자기 보고에 따라 구분된 유형이므로, 모든 내향인이 자극에 예민하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대체로 그렇다. 모든 내향인을 HSP로 정의하긴 어렵다. 하지만 HSP의 70%가 내향인이라는 연구 결과는 그 상관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나타낸다. 글 서두의 안선생은 내향인이다. 그리고 HSP다.
이 책에서 말하는 소심인이 그렇다.
그들에겐 남다른 능력이 있다.
<참고문헌>
Aron, E. N. (n.d.). The Highly Sensitive Person. https://hsperson.com/
Aron, E. N., & Aron, A. (1997). Sensory-processing sensitivity and its relation to introversion and emotionality.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73(2), 345-368.
Aron, E. N., Aron, A., Jagiellowicz, J., & Acevedo, B. (n.d.). FAQ: You talk about DOES as a good way to summarize all the aspects of high sensitivity. The Highly Sensitive Person. https://hsperson.com/faq/evidence-for-does/
Highly Sensitive Person. (2019, June 5). Psychology Today. https://www.psychologytoday.com/us/basics/highly-sensitive-person
Lionetti, F., Aron, A., Aron, E. N., Burns, G. L., Jagiellowicz, J., & Pluess, M. (2018). Dandelions, tulips and orchids: Evidence for the existence of low-sensitive, medium-sensitive and high-sensitive individuals. Translational Psychiatry, 8(1), 24. https://doi.org/10.1038/s41398-017-0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