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주전골은 나에게 특별한 추억이 있는 곳이다.
단짝 친구가 결혼한 후로 토요일에도 오락실에서 게임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무료한 나날이었다. 집으로 가는 언덕길이 높게만 느껴져 어렵게 어렵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남동생이 뛰어 내려오며,
“누나 어떤 남자가 집으로 찾아왔었어. 빨리 가 봐”
“영내와 사귀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세요” 라며 무턱대고 엄마부터 찾아와 명함을 내밀고 갔다는 사람은 전 남자 친구!
대학교 1 학년 때 만난 우리는 나는 대학생 새내기로 그는 취업준비생으로 도서관에서 만나 공부하는 만남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시들해지기 시작했고 또 어느 날 헤어지고 말았다.
그랬던 우리가 그날 이후로 다시 만나기 시작했고 멋진 사회인으로 변신한 그 사람은 다시 나를 설레게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설악산으로 캠핑을 가자는 제안에 나는 흔쾌히 동의를 하였다.
우리의 첫 여행이며 난생처음 캠핑이란 것을 하게 된 날이다.
바리바리 먹거리를 준비해 갔건만 빠진 것이 있었다. 그 사람은 그것을 사기 위하여 산 아래로 내려갔고 나는 혼자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한산한 계곡에 캠핑객은 우리뿐이었다.
그때 몰려오는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우리 텐트를 기웃거리더니 계곡으로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텐트 속으로 급히 들어갔고 텐트 칠 때 쓰던 삽 같은 것을 손에 쥐고는 그저 그 사람이 빨리 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정말 무서웠고 가슴이 떨렸다. 그들이 오륙 미터 앞까지 왔을 때 나의 가슴은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로 쿵쾅거렸다.
"하느님, 부처님 제발..." 그때 저쪽 모퉁이에서 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텐트 지퍼를 내리고 손을 흔들며 "종승 씨~~~" 그 사람은 미친 듯이 달려왔고 그들은 슬금슬금 오던 길을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울 남자가 얼마나 멋지게 보였던지.
낮까지도 멀쩡했던 날씨는 밤이 되면서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내리더니 점차 폭우로 변해갔다. 순식간에 불어난 계곡물은 빠른 속도로 텐트 가까이 다가왔다. 밤새 손전등을 켠 채로 텐트 밖만을 주시하던 우리는 한밤중에 텐트를 걷어야만 했다. 물에 빠진 생쥐가 된 채 허겁지겁 산을 내려왔을 때는 희미하게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온 비 다 맞으며 텐트를 걷던 그의 모습이 또 얼마나 믿음직스럽던지...
이날 이 모습에 반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알콩달콩 살고 있다.
눈에 익숙한 설악산 봉우리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옷을 바꿔 입을 지라도 항상 그 자리에서 믿음직스럽게 나를 기다리고 있다. 직장 생활에 지치고 사람들에게 상처 받아 힘들 때면 자주 찾는 곳이다. 산에 올라 좋은 공기 마시고 오색온천에 몸을 담근 후 동해 바다의 넘실대는 파도를 보고 오면 쌓였던 스트레스는 온데간데 없어진다.
산채백반과 함께 마시는 달콤한 머루주 그리고 잊지 못할 추억이 있는 주전골은 친정집과도 같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