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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미의 세상 Nov 12. 2018

문화 비축기지를 다녀오며

문화 비축기지는 동호회에서 몇 번이나 야외 촬영을 갔었는데 때마다 일이 생겨 가보지 못한 곳이다.  버스 타고 가면서 또 지하철역 앞에 기다리고 있는 회원들을 만나면서  약간 흥분했나 보다. 멀리 보이는 탱크가 궁금하여 바닥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걷던 나는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만 철퍼덕 넘어지고야 말았다. 이번에도 시원치 않은 왼쪽 무릎이다. 체중 때문에 시멘트 바닥에 부딪혔을 때의 고통은 그저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툭툭 털고 일어났으나 가벼운 산책길임에도 걸을 때마다 무릎과 허리가 시큰거렸다. 절뚝거리지 않으려 또다시 미끄러지지 않으려 다리에 온 힘을 주고 걸어가자니 허리부터 발목까지 안 아픈 곳이 없다.




누누이 들어왔던 석유 비축기지라는 말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서 리플릿에 나온 석유파동이란 단어에 갑자기 가슴이 저려오며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군포에 양계장을 크게 하셔서 돈을 버신 아버지가   새롭게 시작하셨던 사업이 양송이 사업이었다.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당진의 양송이 공장.  그 사업은 아마도 석유가 차지하는 비율이 컸었나 보다. 두 번이나 계속된 유류파동으로 안양의 양계장과 서울의 집들은 물론, 고향의 모든 선산까지도 다 잃은 아버지는 거의 매일 술로 지내시다가 마흔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그다지 슬프지가 않았다. 한참 사춘기를 지내고 있던 나에게 매일 술만 드시고 밤새 주정만 하는 아버지는 그저 미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갑자기 어려워진 살림살이에 대한 원망도 아버지 몫이었고, 결혼 후 동생과 엄마를 책임져야만 했던 때도 아버지는 그저 원망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내 나이 마흔아홉이 되어서야 새삼 깨달았다. 삼대독자로 부러울 것 하나 없이 사랑을 받으며 곱게 자라온 아버지가 책임져야 할 일곱 명이나 되는 아이들. 아버지로서 또 집안의 장손으로써 그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우셨을까?



뒤뚱뒤뚱 산길을 오르는데 사진 동호회 고문님을 우연히 만났다. 내 기억 속의 우리 아버지는 사실 젊고 멋쟁이셨다. 그런데 혼자 사진 찍으러 오신 그분이 아버지 같아서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왜 혼자 오셨어요?"
 "누가 나 같은 늙은이랑 다니려고 하나요? 그저 나 혼자 운동 삼아 가까운 곳에 다니는 거지" 
 공연히 죄송스러운 마음에 말동무를 해드렸더니 주름진 얼굴이 금세 환해지신다.   
 우리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저 정도 되셨을까?



겉으로 보기에 썰렁한 원형 탱크만 보이는 이곳, 어디에 가서 무엇을 찍어야 하나? 

그러나 건물 안의 조명과 어우러진 원통 속에서 나는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대었고, 또 다른 탱크들에서 묵직한 세월의 흔적을 느끼며 마치 고대의 유적지를 찾아온 양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녔다.  



얼마쯤 지났을까?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참 이상도 하다. 카메라를 들으면 피곤한 줄을 모르는데 카메라만 내려놓으면 온몸이 아프다. 뒤풀이도 마다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귀가 후 저녁 먹고 꼬박꼬박 졸고 있을 때였다. 큰 오빠의 전화!
 "왜 안 오냐?"
 "응? 오늘! 아, 아버지 제삿날!" 
새까맣게 까먹었다. 늘 전화로 제삿날을 알려주던 올케가 올해는 웬일인지 잊었나 보다. 남편도 방금 친구 아버님 장례식장에 가버렸고, 나 혼자 밤길을  운전해서 안양까지 다녀올 자신이 없다. 오빠는 지금이라도 빨리 오란다
 "올해만 미안~~" 
오빠는 화가 났는지 냅다 수화기를 끊어버린다. 에구 이래서 딸은 필요 없다고 하나 보다. 시댁 제사와 생일은 전부 내 머릿속에 있건만 친정아버지 제사를 까먹다니.  비몽사몽 하던 나는 잠이 홀딱 달아나 버렸다.  아, 석유파동이란 단어 때문이 아니었구나.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나더니... 
 


새벽에 돌아온 남편에게 괜히 볼멘소리를 했다. 

 "오늘 당신 장인어른 제사였어"
 "그래? 알았으면 고민할 뻔했네. 친구 아버님도 돌아가셨으니"
 찜찜하고 개운치 않던 차에 남편은 제대로 꼬투리를 잡혔다. 
 "무조건 장인 제사에 가야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냅다 퍼붓고 나서야 나의 찜찜한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내년에는 꼭 메모를 해 두었다가 잊지 말아야지! 아버지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 달 엄마 제사 때 제가 더 정성껏 차려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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