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번의 연애(또는 연애 비슷한 것들)와 수십번의 소개팅이 끝난 후, 나에게 남은건 우두커니 홀로 남겨진 원룸의 까만 밤과 그 적막 위에 놓인 라디오 소리 뿐이었다. 외롭지 않고 싶고 외로움에 익숙해지지 않고 싶어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오히려 짙은 고독이 나를 파고들었다. 나를 재고 있는 상대의 눈빛, 똑같이 그를 계산하고 있는 나의 모습. 싫었다. 가끔 내가 너무 좋다는 사람은 내 맘에 닿지 못했고 내가 맘에 드는 사람에겐 내가 별 존재가 되지 못했으며, 그래도 잘해보려고 서로 노력한 관계는 싸움만을 반복하다 끝이 났다. 그래, 모든 것은 어긋나고 텅 빈 마음만이 남았다.
기분이 너무 우울해서 사랑니를 뽑기로 했다. 좀 변태적이고 가학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정신이 너무 괴로울 때는 어느 정도 신체적 고통이 우울을 덜어주기도 하기 때문에, 가을이 깊어지며 낙엽 냄새에 지난 이별의 상처가 스멀스멀 올라오려 할 때 치과를 찾았다. 그 전날 밤을 새고 술을 마셨던 탓인지 마취를 하기도 전에 이미 반 마취 상태로 치과 의자에서 졸았다. 오른쪽 위아래 사랑니 두개를 뽑는건 생각보다 너무나 안 아파서 신체적 고통이 심란한 마음을 잠시 잊게 해줄거라는 자가 처방은 소용이 없어졌지만, 시원한게 기분이 괜찮았다.
정말 마지막이야
토요일에 사랑니를 뽑고 목요일날 소개팅을 했다. 큰 기대는 없었다. 이젠 진짜 지쳤어. 잡아둔 약속이니 밥이나 먹고 오자. 이것만 하고 출장과 두번의 휴가로 바쁘게 지낸 뒤 2019년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그 뒤로 서른 하나가 되면 본격적으로 '혼자 사는 삶'을 설계해보자고, 더 이상 인류애를 잃게 만드는 인위적인 만남은 그만두자고 마음 먹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그 사람이.
첫 만남에서 파스타와 리조또를 먹고 2차로 맥주를 마시며 우리가 서너시간 동안 나눈 이야기는 '고독과 명상'이었다. 나보다 두살 어리지만 두배 어른스러운 이 사람이 지난 연애의 상처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어떤 일들을 했는지 들으며 나는 전율했다. 모든 것이 닮아 있었다. 더욱 혼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그 상태를 이겨내기 위해 미친듯이 책을 읽고 글을 썼던 일, 그러다가 읽은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명상에 관한 이야기를 보고 '결국 답은 마음 공부에 있는 것인가' 생각하며 요가 수행을 하는 선배를 따라 명상을 하러 가야할까 싶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한편으로는 걱정했다. '혹시 맞장구 치려고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하진 않을까? 첫 만남에서 통하기엔 너무 희소한 공감대잖아'
하지만 나도 그도 알았다. 처절하게 겪어내지 않고서는 절대 꾸며낼 수 없는 이야기라는걸. 그래서 우린 점점 더 깊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깊이 빠져들었다. 그 날 밤, 한남동에서 버스를 타는 나의 뒷모습에 남은 그의 시선을 보면서 생각했다.
'우리 사귀게 되겠구나'
그 날 이후 우리는 매일 같이 통화를 하고, 거의 매일 만났다. 지난 연애에서 상처 받고도 도화지처럼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이 남자는 한 바닥 빼곡하게 편지를 써서 마음을 고백했고, 나는 내 작은 방의 노란 조명 아래서 그 편지를 꾹꾹 눌러 담아 읽으며 펑펑 울었다. 매일 매순간 혼자였던 그 공간에서 처음으로 누군가 나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난 이미 치유되고 있었다.
단걸 먹고싶다는 나의 지나가는 말을 듣고 마들렌을 구워온 이 남자
우리는 너무나 빠른 속도로 서로에게 없어선 안될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책과 글을 좋아하는 우리는 서로의 글을 보여주고 함께 가고 싶은 여행지를 고른다. 요리도 잘하는 이 남자는 6개월의 자취생활 내내 닭가슴살과 단호박으로 연명하던 나에게 끝내주는 스테이크를 만들어줬다(우리집에서도 이런 음식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불쑥 회사 앞으로 찾아와서 설레게 하고, 한시도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루에도 몇번씩 해줘서, 덕분에 난 요즘 스무살마냥 발그레해져서 수줍어한다(주책이다). 매일 같이 만나는데도 헤어지기가 싫어서 막차 시간까지 서로를 부여잡고 있다가 수화기 넘어 애틋한 목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요즘. 누군가는 '연애 초기라 그래' 하겠지만 뭐 그럼 어때? 이제까지 나의 연애는 처음에조차도 이렇지 않았는걸.
그리고 내 남자친구 말이 '그냥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사랑하자'고 했다. 지금 너무 행복하니까. 내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것처럼 세상의 빛깔이 달라보이니까. 그 사람 어깨에 기대 있으면 피난처가 생긴 것처럼 너무 편안하니까. 그냥 앞도 옆도 보지 말고 서로만 바라보면서 지금 행복하자고 다짐했다.
새로운 사랑은 온다. 오더라 거짓말처럼.
내 브런치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비극적인 긴 연애의 끝을 맞은 내가 작년 이 맘 때쯤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지 알 것이다. 다시는 사랑하지 못할 것 같던 내가 그 어느 때보다 예쁘고 순수한 사랑을 하고 있다. 그러니 혹여나 사랑에 상처받은 그대들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니 좋은 사람을 만나는 기적이 찾아왔음을, 이 행운이 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전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