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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피디 Oct 27. 2021

할아버지는 유일하게 나를 걱정시키지 않는 어른이었다

불행이 알려준 행복의 조건

크고 작은 일들이 너무 많은 한 해라, 차분히 펜 들고 글을 쓸 여유가 없었다. 만 31살을 꽉 채운 생일날이 되어서야 휴가를 내고 가만히 원목 테이블에 앉았다.


불행은 가끔 뒷통수를 치고 온다


인생 오래 살아본 나이는 아니지만, 살다보니 깨우쳐지는 것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삶에서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되는
 '온전한 행복의 순간'은 정말 찰나이며,
사실은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이상하게도 일이 잘 풀리는 한해였다. 이사도 했고 너무나 원하던 곳으로 이직도 했다. 새로운 회사에선 새로운 직무를 맡게되어 일이 어렵고 긴장의 연속이긴 하지만 배울게 너무 많고, 무엇보다 팀장님을 비롯한 사람들이 좋아 정말 만족스럽다. 오랜만에 연애도 안정적이면서 설렘을 유지하는 이상적인 궤도에 올랐고, 엄마아빠는 건강하고 각자의 돈벌이도 잘 유지하고 있어서 예전보다 집안에 신경 쓸 일도 덜었다. 물론 나도 건강하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롭다.


그러나, 이렇게 인생의 모든 요소들이 한꺼번에 "괜찮다-" 생각되는 날들은 내가 성인이 된 이래 별로 없었으므로, 나는 안도하고 감사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원래 불행은 별안간에 뒷통수를 치는 법이니까.


그러던 8월의 한 여름,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쓰러졌다. 외할아버지의 뇌경색이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할아버지에게 효도여행을 선물하고 난 뒤, 딱 한달만이었다.



그는 유일하게 나를 걱정시키지 않는

어른이었다


할아버지가 쓰러지고 나는 완전히 무너졌다.


할아버지는 유일하게 나를 걱정시키지 않는 어른이었다. 신의 불안과 걱정을 한사코 뒤로 숨겨두고 나에게는 가장 말갛고 화사한 것들만 내어놓던 사람이었다. 내 이직과 이사가 너무나 기쁜 나머지, 하루가 멀다하고 전화해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집과 직장은 어떠냐'물으시던 할아버지. 매번 같은 대답인데도, "너무 좋아요, 행복해요"라고 말하며 웃는 목소리가 듣고 싶어 똑같은 질문을 새롭게도 하시던 . 온전히 나의 감정에만 집중해주고 본인의 힘듦과 외로움, 아픔 등은 내어놓지 않사람. 내가 태어난 31년 전부터 지금까지 인생의 1번은 오직 손녀딸이었던, 어렵고 불안한 집안환경에 상처받지 않을까 노심초사 내 맘을 살피셨던, 내 7년반의 연애가 끝났다는 소식에 손녀딸이 얼마나 힘들까 눈물 밤을 새셨다는, 내 할아버지. 덕분에 나는 할아버지 앞에서만큼은 어린아이마냥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런 할아버지를 내가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는지, 할아버지가 쓰러지고 나서야 알게됐다. 수십년간 매일 나를 걱정하고 궁금해하던 사람의 존재가 사라지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었는지, 그 사랑이 나를 얼마나 굳건하게 지탱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의 존재가 자존감, 자존심, 안정적인 애착관계 등 모든 좋은 것의 뿌리였는 것도.



마음으로 기억한단다, 우리 아가


울며 잠들던 밤이 여럿 지나고, 천만다행으로 할아버지는 돌아가지 않으셨다. 비록 그토록 기뻐했던 손녀딸의 이직, 이사, 대학, 그리고 그리도 행복해하시던- 쓰러지기 바로 한달 전의 부산여행까지 모두 기억하지 못하시지만.


처음엔 내 휴대폰에 할아버지의 전화벨이 울리지 않는게 믿기지 않아 울었고, 따뜻하게 나를 걱정해주던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어서 울었고, 할아버지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그래서 나도 더 행복했던 나의 기쁜 일들이 더이상 할아버지 삶의 낙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퍼서 울었다. 할아버지가 나를 잊어버리면 어떡하지, 우리 행복했던 시간들을 나 혼자 기억한 채 살게 되면 어떡하지. 두려웠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행복, 기쁨, 사랑 같은 감정들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에도 차곡차곡 저장이 되나보다. 우리가 어떤 일로 기뻤는지, 무엇을 함께하며 행복했는지를 할아버지가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여전히 그의 1순위는 나였다. 누가 곁에 있든,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이 몇시인지 전혀 인지가 없는 상황에서도, 할아버지는 5분마다 내 이름을 불렀다. OO이는 어디있냐고. 보고싶다고.


코로나로 삼엄해진 면회에 가까스로 까다로운 절차를 끝내고 대학병원에서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 내가 "할아버지"라고 부르자 그는, 시신경이 죽어 이제는 잘 보이지 않는 눈을 힘겹게 뜨고, 아주 활짝 웃었다. 아무 걱정 말라는듯이. 할애비 아직 여기 있다고.

어린 나와 할아버지

괜찮아, 고개를 들어봐


지난주에 할아버지는 집으로 오셨다. 균이 생기는 바람에 격리병원으로 가셨었는데, 가족에 대한 애착이 크신 분이라 상심이 너무 심해 논의 끝에 집으로 모시고 방문재활 등을 병행하고 있다.


뒷통수를 치고 왔던 불행에 숙여진 고개 들어올리기 직전이 가장 두렵다. 그런데 용기내서 빳빳히 들고 나면, 생각보다 그렇게 최악은 아닌 것 같다. 으로 내 인생에 닥칠 더 큰 불행들도 마찬가지겠지. 방심한 사이에 뒤로 오든, 아예 직격탄으로 앞으로 오든, 내 마음만 단단히 준비가 되어있다면 괜찮을 것 같다. 어쩌면 점점 더 괜찮아지는 과정이 인생 아닐까. 


그러니 행복한 시간에는 흠뻑 행복하자.

일단 그가 다시 내 곁으로 와주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올해 여름, 할아버지와의 부산
이곳을 또 모시고 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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