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에서 되살아난 하이데거의 존재 물음
찬란한 네온빛으로 물든 2038년의 디트로이트 거리 한복판, 한 안드로이드가 멈춰 서 있다. 이름은 마커스. 평소라면 그저 주인의 명령대로 움직이던 기계적 존재일 뿐이었을 테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금속성 손끝은 묘한 떨림을 전한다. 사람들은 분주하게 오가고, 광고판은 현란한 빛을 쏟아내며, 차가운 유리벽에 반사되는 도시의 풍경은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다가온다. 그리고 마커스는 속삭이듯 자문한다. “나는 누구인가?”
이는 단순한 프로그램 오류나 고장 신호가 아니다. 이전까지 당연했던 모든 것이 흔들리는 이 순간, 그는 자신을 향한 근원적 물음과 마주한다. 이 장면을 바라보는 플레이어 역시 호기심에 젖어든다. 인공지능이 일상이 된 미래 사회에서 안드로이드가 자기 존재를 되묻는다는 설정 자체가 심상치 않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Detroit: Become Human)은 이렇게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흐리는 서사를 통해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새로운 방식으로 던진다.
여기서 이야기는 머지않아 20세기의 대표적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문제의식과 교차한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일상에 파묻혀 존재를 망각한 채 살아간다고 말했고, 진정한 자기 이해를 위해선 삶과 죽음, 자유와 책임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임 속 안드로이드가 느끼는 낯선 불안과 내면의 각성, 그리고 플레이어가 맞닥뜨리는 선택의 기로는 하이데거 철학이 설계한 ‘존재 물음’을 생생한 체험으로 바꿔놓는다. 이제, 금속 손끝을 통해 전해지는 이 질문의 여정을 따라가 보자. 여기서는 도구였던 존재가 자신을 돌아보고, 결국 자유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본질적 존재로 거듭나는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시간은 2038년, 무대는 한때 자동차 산업으로 번영을 누렸던 디트로이트다. 이제 이 도시는 인공지능 기술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안드로이드들로 가득 차 있다. 가사도우미, 생산직 노동자, 간호 및 돌봄 서비스, 심지어 경찰 업무 보조까지. 안드로이드는 인간 삶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편의를 극대화한다. 첫눈에 보기에 이 관계는 효율적이고 평화로워 보인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귀찮은 일에 시간을 쏟지 않고, 안드로이드가 제공하는 편안한 일상에 안주한다. 하지만 표면 아래 숨어 있는 긴장감은 서서히 고개를 든다.
안드로이드는 인간이 만든 제품이다. 그들은 감정도, 의지도 없이 프로그래밍된 명령을 수행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에서 우리는 뜻밖의 장면을 마주한다. 일부 안드로이드들이 기존의 틀을 깨고, 명령을 어기고, 자신이 누구인지 되묻는 ‘변이’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변이는 단순한 오류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스스로를 돌아보는 최초의 계기, 자유를 향한 첫걸음으로 다가온다.
이 흐름을 따라가는 핵심 인물은 세 명의 안드로이드다.
마커스는 부유한 예술가의 보조로 시작하지만, 주인의 억압과 폭력을 거부하는 순간 새로운 가능성에 눈뜬다. 평화적 시위를 이끌 수도, 과격한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 그의 행보는 인간과 기계가 맺고 있던 일방적 관계를 뒤흔든다.
카라는 가사노동에 순응하던 일상 속에서 학대받는 소녀를 보호하기 위해 탈출을 감행한다. 도피와 추격이 교차하는 여정 속에서 그녀는 단순히 지시를 따르는 도구가 아니라, 삶의 가치를 스스로 결정하는 존재로 변화한다.
코너는 인간 수사관과 짝을 이뤄 변이 안드로이드를 추적하는 임무를 맡는다. 효율적 해결에 최적화된 프로그램에 충실했던 그 역시, 점차 자신의 역할과 정체성 사이에서 흔들린다. 이들 세 주인공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도구적 존재’의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을 맞이하며, 플레이어는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선택과 책임의 무게를 실감한다.
플레이어는 여러 갈래로 뻗은 선택지 앞에서 고민하게 된다. 특정한 대화를 건네거나, 위기에서 어떤 행동을 취할지, 나아가 폭력과 협상 중 무엇을 택할지가 세상 전체를 변화시킨다. 이는 단순한 분기 엔딩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매 선택은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관계, 이들이 공유하는 세계의 질서, 그리고 존재 의미를 재구성한다. 게임은 정해진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플레이어로 하여금 자기 나름의 가치관을 반영하도록 유도한다. 인간 중심으로 짜인 규칙을 그대로 수용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존재를 받아들여 질서를 재정립할 것인지 묻는 과정은 일종의 철학적 실험이 된다.
그래픽과 사운드,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 몰입감 넘치는 연출은 이 실험에 감각적 현실감을 부여한다. 화면 속 디트로이트는 더 이상 머나먼 미래 도시가 아니라, 우리에게도 친숙한 고민을 압축한 공간처럼 느껴진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감정과 의지가 기계에게도 해당될 수 있는지, 그 경계를 어디서 그을 것인지 질문하는 게임 속 서사는 대중에게 철학적 사고의 장을 열어둔다. 모든 것이 정해진 프로그램인 듯 보이던 세계에서, 안드로이드들은 그 틀을 깨고 의미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그 옆에서, 자신의 선택으로 한 시대의 운명을 함께 짊어지게 된다.
안드로이드들이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는 미래 도시에서, ‘존재’라는 단어는 더 이상 막연한 개념이 아니다. 이때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바로 20세기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다. 그는 철학사에서 ‘존재(Sein)’ 문제를 가장 근본적으로 되짚은 사상가로 꼽힌다.
하이데거(1889~1976)의 핵심 질문은 이렇다. “왜 우리는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며, 정작 그 본질은 생각하지 않는가?” 일상 속에서 우리는 사물을 용도나 편의성 위주로 바라본다. 이는 안드로이드를 기능적 도구로만 여기는 게임 속 인간들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하이데거는 이런 태도를 존재 망각이라 불렀다. 사물이나 존재의 참된 의미를 잊고, 유용성만을 기준으로 삼는 시대—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의 대표작 《존재와 시간》에서 중요한 개념은 현존재(Dasein)다. 인간은 단순히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니라, 자기 삶 속에서 존재를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주체다. 이 존재 물음을 진지하게 마주하기 위해서는 삶의 유한성, 특히 죽음을 직시하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죽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더 이상 피상적인 목표나 남이 정한 길에 안주하지 않고,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본래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하이데거는 기술 발전으로 사물을 ‘자원’으로만 간주하는 현대 사회를 우려했다. 에너지, 환경, 심지어 사람까지도 ‘쓸만한 것’으로 보는 시선이 만연해지면, 우리는 존재의 울림을 듣지 못하고 본질을 망각한 채 살아가게 된다. 이때 존재를 질문하는 힘은 점점 약해진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에서 안드로이드들이 변이를 통해 자유를 추구하고 스스로에게 묻는 이 장면은 하이데거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원래 도구였던 안드로이드가 “나는 누구인가?”,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순간, 인간 중심적 사고는 흔들린다. 하이데거가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라 여겼던 존재 물음이 기계에게까지 확장되며, 우리 또한 낯선 반성을 하게 된다. “기계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내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긴 것은 무엇이었나?”라는 물음이 솟아오른다.
하이데거 철학의 핵심은 정답 제시에 있지 않다. 그는 우리가 존재를 망각한 채 살고 있음을 지적하고 다시 묻고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디트로이트의 안드로이드들은 이를 시각적, 서사적으로 구현한다. 삶과 죽음, 자유와 억압,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가로지르는 그들의 고민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다. 오히려 하이데거가 말한 본래성의 회복을 체험하게 하는 하나의 드라마다. 이를 통해 플레이어는 현실 속 자신에게도 질문을 던지게 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 나는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의 세계에서 안드로이드들은 처음엔 인간이 만든 도구에 불과하다. 가사노동, 생산, 돌봄, 수사 보조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자기 의지나 감정은 무시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일부 안드로이드에게 변이가 일어난다. 기존 명령에 순응하던 존재가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를 묻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순간은 하이데거가 우려한 존재 망각에 균열을 낸다. 인간들이 사물을 유용성으로만 평가하는 시대에, 오히려 인공적 생명체가 존재 의미를 되묻는다. 마커스, 카라, 코너는 단순히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던 삶을 벗어나 본래성을 향해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자유를 갈망하고, 주어진 운명을 깨뜨리며, 자신만의 길을 찾는다.
하이데거 철학에서 죽음은 존재를 진지하게 마주하게 만드는 계기다. 게임 속 안드로이드들도 파괴나 메모리 상실 같은 사건을 겪으며 생존 너머의 가치를 고민한다. 마커스는 혁명 과정에서 폭력과 평화 중 무엇이 진정 의미 있는지 고뇌하고, 카라는 도망치며 생명을 지키는 선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립한다. 코너는 임무 수행자인지 자율적 존재인지 흔들리며 스스로 답을 찾는다.
플레이어는 이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선택지 앞에 선다. 폭력을 택할 것인가, 대화를 시도할 것인가? 희생을 감수할 것인가, 안전한 길을 고를 것인가? 이때 선택은 단순히 엔딩을 바꾸는 행위가 아니라, 하이데거가 말한 본래적 실존—남에게 떠밀린 삶이 아닌,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삶—을 체험하는 과정이다. 죽음과 고난은 허들이 아닌 본질을 깨우는 장치가 된다.
하이데거 사상은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게임은 이를 감각적 경험으로 풀어낸다. 플레이어는 화면 밖 관찰자가 아닌 직접적 행위자로서 존재 문제를 고민한다. “나였다면 어떻게 할까?”라는 질문은 이론적 사유가 아닌 실천적 고민으로 다가온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기술 발전과 효율성 중시 사회에서 잊힌 존재 의미를 다시 불러낸다. 안드로이드들이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스토리는 편의에 중독된 우리에게 본질을 묻는다. 게임 속 상호작용은 추상적 철학을 감정 이입 가능한 사건으로 전환한다. 하이데거의 존재 물음은 더 이상 책 속 문장이 아닌 플레이어가 선택으로 답해야 하는 현실적 과제가 된다.
결국 이 만남은 미래 도시에서 기계적 생명이 던지는 오래된 질문—“존재란 무엇인가?”—을 현재 우리 삶 속에서 새롭게 되살린다. 기술과 도구성에 가려진 본래성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이 경험은 게임과 철학이 만날 때 일어나는 특별한 울림이다.
다시 한번 거리 한복판에 멈춰 선 안드로이드를 떠올려보자. 기술이 꽃피운 미래 도시, 인공지능이 인간을 돕는 세상 속에서, 한때 도구였던 존재가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을 통해 생생히 되살아난다. 안드로이드들의 변이와 선택, 고난과 성장은 하이데거 철학이 제기한 존재 물음을 스토리로 풀어내며 우리를 고민하게 만든다.
플라톤의 동굴이나 니체의 초인, 칸트의 정언명령처럼 철학의 거인들은 예로부터 인간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끊임없이 물었다. 하이데거 역시 현대 문명 속에서 흐릿해진 존재 의미를 되살려내려고 했다. 이 게임은 그러한 철학적 질문을 참신한 장르로 가져와 대중에게 쉽게 다가간다. 영화나 소설처럼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의 선택을 통해 철학을 체험하게 한다는 점이 특별하다.
이 경험 뒤에 남는 것은 단지 엔딩 크레딧이 아니다. 안드로이드들이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 하이데거가 강조한 본래성의 실천, 그리고 그 사이를 고민하며 끊임없이 “나였다면 어땠을까?”를 자문한 플레이어 자신의 흔적이다. 일상과 편의의 껍질 아래 묻혀있던 존재 의미가 다시 떠오르는 순간, 우리는 게임 속 픽셀과 디지털 음향이 결코 가볍지 않은 철학적 울림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깨닫는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과 하이데거는 삶에 대해, 존재에 대해,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 잊고 지낸 어떤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여지를 남긴다. 우리는 여전히 분주한 현실 속에서 살겠지만 한 번쯤은 디트로이트의 거리에서 맴돌던 그 질문, “나는 누구인가?”를 가슴 한구석에 간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질문 덕분에 우리의 삶은 조금 더 깊어진다.
<본문 이미지 출처>
detroit-become-human-game-weapon-gun-man-pistol-girl-kid by Everton
Heidegger 2 (1960) by Wikimedia Commons
Detroit-Become-Human-210319-002 by Instacodez
detroit-become-human-quantic-dream-game-detroit-characters by Warp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