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수준비가 대체 뭐길래..
하루하루 옥죄어오면서 다가오는 결혼식보다 우리 커플이 더욱 신경 쓰는 게 있었다. 신혼집 곳곳을 차지할 혼수들이다. 처음부터 결혼식에 전력을 하지 않기로 했던 만큼 이건 가성비로 하겠지만, 우리가 마련한 소중한 보금자리에서 평생..까지는 아니겠지만 오랫동안 쓸 물품을 골라야 했기에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게 선택해야만 했다.
연애할 때 가끔 가전코너를 지나치면 '이걸 우리 집에 들여놓자', '저건 어떨까? 잘 어울릴까?' 등 제품들을 살펴보면서 미래의 우리 집에 배치하는 상상을 함께 하곤 했다. 상상이 이제 현실이 되었고, 마음속 장바구니에 담아뒀던 제품들을 다 꺼낼 때가 됐다.
혼수 구입에 앞서, 사소한 꿀팁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예비 혹은 신혼부부들이 가입한 카페에 가입했다. 글을 쓸 수 없는 등급이라 구체적으로 물어볼 순 없지만 눈팅하면서 크고 작은 정보들을 주워 담았다.
역시 먼저 경험한 선배님들과 같이 준비하는 동기들이 모여 만들어진 집단지성의 힘은 참으로 놀라웠다. 신혼부부 혼수할인 방법이나 백화점 웨딩클럽 가입, 추천 신용카드, 특별 할인 기간 등 까딱하면 놓칠 뻔한 내용들이 한 데 모여있었다. 가입하지 않았더라면 아무것도 모르고 맨땅에 헤딩했다가 머리가 와장창 깨져서 병원에 실려갔을 것이다.
특히 블랙 프라이데이가 있는 11월이 혼수 할인율이 가장 높았다. 이때를 맞춰 각 백화점이나 할인매장에선 신혼부부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이들을 겨냥한 할인 행사를 진행 중이었다. 박영진의 표현을 빌리면, 구매하러 오는 이들을 낚을 확률을 최대치로 높이는 것이 할인이라는데 아무렴 어떠냐. 같은 제품을 최대한 싸게 살 수 있으면 장땡이지.
남들보다 준비를 늦게(?) 시작한 우리 입장에선 블랙 프라이데이를 포함한 할인 행사 이벤트가 많은 11월이 절호의 찬스. 그래서 11월이 끝나기 전에 꼭 사야 할 혼수들을 구매완료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11월 XX일, 토요일 신촌 H 백화점.
웨딩카페가 H 백화점과 제휴를 맺어 혼수 할인 행사를 한다는 소식을 접해 데이트하는 김에 겸사겸사 백화점을 방문했다. 넋 놓고 당하는 호갱님이 되지 않겠다며 끊임없이 정신무장을 하면서 가전코너에 입성.
나는 방문 전부터 L사 세트를 밀고 있었다. 우연히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아이돌 2명이 가전제품을 체험하는 영상을 접했고, 너무나 내 스타일이었다. 또 결혼한 사람들로부터 강력추천받기도 해서 더더욱 눈에 갔다.
가격대가 얼마나 나오는지 시장조사하는 건데도 우리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테이블에 앉아 점원과 상담했다. 견적을 뽑은 뒤 점원은 '이 정도 나오는데 저희랑 계약하실래요?'라는 눈빛을 보냈고, 우리는 일부러 외면하며 "한 번 둘러보고 올게요"라고 말하며 자리를 떠났다. 좋았어, 말려들지 않았다.
다음으로는 침대 및 침구류를 둘러봤다. 그중 유명 브랜드 업체가 눈에 들어와 잠깐 발길을 멈췄다. 한 번 누워서 느껴보라는 점원의 말에 거절하지 않고 퀸사이즈 침대에 내 집처럼 편하게 누웠다. 역시 유명 브랜드 다운 안락함과 푹신함이다. 가격도 네임밸류답게 비쌌다. 생활용품점에서 봤던 퀸사이즈 침대 가격 정도를 예상했는데, 훨씬 웃돌았다. 예상 지출액을 다시 수정해야겠다.
그렇게 가구, 주방용품까지 한 번 훑어보고 나왔다. H 백화점의 판매가격을 기준점 삼아서 경쟁사인 S 백화점, L 백화점에서 판매 중인 동일 제품도 검색해봤다. 어라? L이 더 싸네? 심지어 웨딩클럽 할인도 더 좋네?? 심지어 이 지점은 할인율이 더 높네??? 어????
궁금증을 참지 못한 뉴비는 해답을 찾기 위해 다시 한번 결혼 준비 카페로 달려갔다. 다른 회원들 말에 따르면, 가장 최근에 오픈한 지점 등 일부 지점에서 따로 할인 프로모션을 하는 경우가 많으니 놓치지 말라고 하더라.
특히 L 백화점 동탄지점이 가장 최근에 오픈해서 할인율이 더 높다는 후기들이 여럿 보였다. 그렇담, 혼수를 싸게 사기 위해 동탄까지 가야 한다는 건가. 문제는 동탄까지 가는 교통편이.. 갈등하게 만든다. 동탄과 가까운 수원에 사는 내 입장만 하더라도, 자차가 없다면 소요시간이 2, 3배 걸리는 황당한 루트를 자랑하고 서울에 사는 J는 SRT를 타고 와야만 한다는 것. 혼수 할인을 더 많이 받으려면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는 것이구나..
차선책이 없었다. 가성비를 따지는 우리의 입장에선 거리가 멀고 가기 불편해도 싸게 사야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동탄으로 모험(?)을 떠났다.
11월 중순 토요일 오전 11시, 동탄 L 백화점.
아침 9시에 집에서 나왔는데, 빙빙 돌아가는 버스 코스, 그리고 기약 없는 환승 대기시간 덕분에 2시간 가까이 걸리는 매직을 경험했다. 택시 타면 20분 만에 갈 거리인데 이렇게 오래 걸리다니... 서울에서 오는 J를 동탄역에서 픽업한 뒤 L 백화점으로 입장. 다른 코너 다 건너뛰고 가전, 가구, 침구류가 있는 6층으로 곧장 올라갔다.
"우와~"
6층 한 바퀴를 돌고 난 커플의 반응은 이랬다. 다양한 브랜드가 입점하기도 했지만, 제일 크게 놀란 건 가격대였다. 우리가 방문할 수 있는 L 백화점 중 가장 최근에 오픈해서인지 할인율이 더 높았다는 것. 또 블랙 프라이데이가 있는 11월을 기념해 일부 제휴카드로 결제하면 추가 중복할인까지 된다는 말에 어느새 몸과 마음은 절반 이상 넘어간 상태. 게다가 할인 기간 마지막날을 확인하자마자 '빨리 결제해야 하는데'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아직 11월이 많이 남았는데도 말이다.
제일 먼저 찾아본 건 L 가전제품. 최애로 밀고 있던 나의 믿음을 배반하지 않았다. TV+냉장고(정수기 포함)+세탁건조일체기+의류관리기 묶음세트에 무선 대형 스피커 증정 얹어서 500만 원 세이브할 수 있다는 점원의 말에 오케이 여기로 결정.
당장 진행시켜! 라고 생각하겠지만, 바로 결제로 이어지진 않았다. 우리의 보금자리로 배송하기까지 시간도 넉넉했고, 재고도 넉넉히 있어서였다.
중요한 걸 확인하고 밥 먹으러 가는 길에 우연찮게 팝업으로 들어온 가구 업체 W의 소파와 원목테이블이 눈에 들어왔고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하지만 호갱님처럼 바로 결제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척 대략적인 견적만 뽑았다. 소파, 원목 테이블, 의자 세트로 문의했더니 기존 판매가에서 200만 원가량 할인해서 살 수 있단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인데도 우리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다른 백화점이 더 싸게 팔 수도 있다는 의심이 우리 커플의 충동구매를 막아섰다. "다른 데 둘러보고 올게요~"라고 'I`ll be back' 스러운 약속을 남기고 한 발 후퇴.
W 브랜드를 찜해두고 그 옆에 위치한 침대 브랜드로 갔다. 여기도 견적을 뽑았더니 판매가보다 싸게 살 수 있더라. 이상한 기분이 들면서도 싸게 사면 좋은 게 아닌가 싶어 여기도 일단 찜.
가장 시급(?)했던 가전제품을 해결했으니 동탄 원정은 제법 괜찮은 성과를 얻었다. 하지만 동탄 원정을 치르는 동안 J가 몸살이 났다. 혼수 구상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끌어다 쓴 게 체력바닥으로 이어졌고, 동탄 원정 후유증으로 일주일간 골골 댔다.
며칠 뒤, 서울 내 다른 백화점 일부 지점을 방문할 일이 있어서 우리 커플은 W 브랜드를 찾아 나섰다. 동탄까지 가기엔 접근성이 너무 멀어서 서울에서 비슷하거나 더 싸게 구할 수 있으면 서울 밖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견적을 뽑았더니 동탄 L 백화점보다 되려 비쌌다. 다시 한번 동탄 원정을 준비해야만 했다.
2차 동탄 원정은 나 혼자 떠났다. 때마침 평일 연차를 쓸 수 있게 돼서 J의 오더를 손에 쥐고 L 백화점으로 고고. 최적의 가격을 제시했던 W 브랜드를 재방문했더니, 점원들이 내 얼굴을 기억해줬다. 이것저것 가격을 다 물어보고 갔던 게 기억에 남았던 걸까.
두 번째 방문이기에 대화는 첫 방문 때와 달리 매우 간결했다. 이전에 견적 봤던 물품(소파, 원목 테이블, 의자 세트) 받고 침대 프레임, 나이트 스탠드, 커피 테이블까지 얹어서 살 건데 견적을 다시 뽑아달라고 이야기했다. 이왕 싸게 살 수 있다면 한 브랜드에서 해결하려는 J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할인율이 온라인 몰보다 여기가 더 높았던 것도 한 몫 했다. 이전 방문 때보다 더 많은 물품을 구매하겠다는 고객의 요청에 판매자 입장에선 당연히 신났다. 하지만 해외 직수입이라 재고를 체크해봐야 한다는 말에 안심하긴 이른 상황이다.
직영매장에 전화를 돌리던 점원은 결과를 통보했다. 다행히 우리에게 올 친구들은 남아있다는 희소식이었다. 견적을 다시 뽑았더니 기존 판매가에서 200만 원 이상 할인받을 수 있었다. "저희 주말에 와서 결제할 테니까 예약 걸어주세요!" 다음 번에 와서 결제할 생각에 나도 모르게 자꾸 어깨춤을 추고 있었다.
다음 방문지는 D 청소기. J가 계속 D 청소기를 원했고, 나 또한 집에서 애용하고 있던 브랜드였기에 일말의 고민이 없었던 선택. 특정 지점 구분 없이 일부 제품 반값 할인한다길래 얼른 달려갔다. 인기 상품이라 혹시 늦었을까 걱정했지만, 우리에게 돌아올 청소기는 남아있었다. 재고 확인 후 바로 결제 완료하고 J에게 결과보고했다. 이렇게 2차 원정을 마쳤다.
같은 주 주말, 동탄 3차 원정. 이번 원정에는 처제 H가 반지 고르기에 이어 다시 한번 우리의 파티원이 되어줬다. 객관적으로 봐도 괜찮은지 판단해 주고 혹여나 우리가 놓친 부분을 디테일하게 체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날 우리의 구매 계획은 아래와 같다.
1. L 전자가전 세트(냉장고+세탁건조일체기+TV+의류관리기) 구매
2. W 가구 세트(원목 테이블+의자 세트+침대 프레임+커피 테이블+나이트 스탠드)
3. 침대 매트리스
4. 이불 및 베개 커버
당일 큰 변수는 없었다. 계획했던 대로 L 가전(냉장고+세탁건조일체기+TV+의류관리), W 가구(원목 테이블+의자 세트+침대 프레임+커피 테이블+나이트 스탠드), 그리고 침대 매트리스 및 이불 베개 커버까지 순조롭게 구매했다.
카드를 만들면 더 할인받을 수 있다고 해서 내 명의로 새 신용카드까지 만들었다. 물가가 속절없이 오르기만 한 시대에 싸게 구할 수 있으면 뭔들 못할까. 카드로 긁는 금액을 볼 때마다 손이 떨리긴 했지만, 이게 다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는 마음으로 넘겼다.
총 3차례에 걸친 동탄 원정으로 원했던 주요 혼수는 구하긴 했지만, 후유증도 있었다. 혼수 준비에 온 신경을 곤두섰던 J가 동탄을 다녀온 그날 밤에 응급실을 가게 됐다. 한밤중에 생각지도 못한 연락을 받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괜찮아야 할텐데...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지만, 그놈의 혼수 때문에 멀쩡한 사람이 예민해져서 병원까지 가야 할 정도라니.. '오징어 게임' 오일남(오영수) 어르신의 말마따나 "이러다가 다 죽어"
응급실 신세를 지는 등 장거리 원정을 다녀온 혼수 구입의 길. 하지만 동탄 원정을 통해서 주요 혼수만 구매완료한 것이지 끝난 게 아니었다. 혼수를 하나하나 사는 데 전력을 다해 계획하고 두뇌 풀가동하던 J는 "머리 아프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게 됐다.
J는 식기류, 이불, 광파오븐, 로봇청소기 등 우리가 사야할 신혼 살림살이 리스트를 짜고 구매실행에 옮기느라 매일매일 계획했다. 그래서 결혼 2달 전까지 혼수 구매로 스트레스 받으면서 골골 댔다. 혼수가 뭐길래 사람을 이렇게 잡나.
결혼을 준비하는 모든 분들, 혼수를 만만하게 보시다가 크게 다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