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리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
오래된 우리 아파트에는 아주 작은 산책길이 있다. 입주할 때부터 살았으니 거의 17년이 다 되어 가는데, 내가 이 산책길을 걷게 된 건 요즘에서다. 두 달 전에 생애 최초로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가벼운 산책길을 찾다가 그동안 한 번도 가보지 않은 DMZ 같은 곳을 드디어 밟았다. 그저 강아지 산책을 위한 곳이었는데, 요즘 이곳에서 뜻하지 않은 인연들을 만나곤 한다.
어느 날, 한 꼬마가 고양이를 안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둘이 친해 보이는 것이 영락없이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 같았다.
"너희 고양이니?"
"아뇨. 여기 사는 길냥이(길고양이)에요. 너무 많이 먹어서 뚱뚱해졌어요."
아이는 나에게도 '강아지가 몇 개월이냐', '남자냐 여자냐' 하면서 다정하게 묻는다. 그러면서 자기가 6마리쯤 되는 길냥이들의 이름을 붙여 주었다며 뿌듯해한다. 우리 강아지의 이름도 묻길래, 알려주면서 아이의 이름도 물었다.
"전 김가경이에요. 아줌마는 어디 사세요?"
"난 101동에 살아. 넌?"
"전 103동에 살아요."
통성명을 한 우리는 이 아파트에 산 지 몇 년 되었고, 집에서 어떤 강아지를 키우며 어떻게 놀아주는지 한참 수다를 떨었다. 그 이후로 가경이와는 가끔 우연히 만난다. 그럴 때마다 그 녀석은 강아지와 친구처럼 팔짝팔짝 뛰어논다. 가경이를 만난 날은 우리 강아지도 나도 선물을 받은 것처럼 즐겁다.
한번은 20대로 보이는 남매가 길냥이들에게 먹이를 주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런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당혹스러워해서 나도 당황했다. 아마 길냥이들에게 사료를 주는 것을 싫어할까봐 그러는 눈치였다.
얼른 친절 미소를 장착하고는 인사를 건넸다. 그제야 안도하는 두 사람의 표정을 보니 왠지 착한 일을 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 뒤로 두 사람을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곤 하는데, 아무나에게나 꼬리를 흔들며 좋아하는 우리 강아지를 진심으로(그렇다고 믿고 싶다) 반가워한다.
하루는 '수상해' 보이는 한 할머니를 포착했다. 풀숲에 들어가서는 계속 내 동태를 살피는 모습이 마치 어설픈 범인(?)같았다. '나 지금 수상한 일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기운을 온 몸으로 뿜어내서 누가 봐도 의심을 살만 했다. 궁금해서 모른 척 하고 가보니 멋쩍게 웃으면서 "아휴~ 여기 고양이가 사네~" 하신다. 묻지도 않았는데.
할머니가 서 있는 풀밭 밑에는 깨끗한 담요 한 장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 고양이 사료가 놓여 있었다. 내가 뭐라고 할지 표정을 살피시길래 얼른 안심시켜 드렸다. 그러자 바로 이야기 봇물이 터진다. "아기 때부터 봤는데 사람을 아주 잘 따르더라고", "사람 먹는 음식 주면 안 돼", "길에서 사는데도 깨끗해" 등등.
할머니 덕분에 우리 동네 길고양이 현황 파악을 했다. 더불어 할머니가 요즘 심장이 안 좋아져서 멀리 나가지 못해 속상하다는 하소연도 덤으로 들었다. 어쩐지 그런 수다가 정다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길고양이가 잘 지내는 것에 대한 안심인지, 길고양이를 돌보는 사람이 많은 것에 대한 안심인지, 아니면 길을 떠도는 생명을 돌보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안심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으나 어쩐지 안도감 비슷한 것이 들었다. 이어서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한 온기가 올라왔다.
특별하지 않아서 특별한 삶
특별하지 않은 일상 속에도 빛나는 순간은 존재한다. 그 순간을 발견하느냐 지나치느냐는 개인의 몫. 별것 아닌 이런 순간들이 참 따뜻하다고 느끼는 요즘, 비슷한 결의 책을 만났다. 제목은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 일상의 희로애락을 놓치지 않고 소중하게 여기는 작가의 시선이 담긴 에세이집이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마음에 와닿았던 글이 바로 길냥이에 대한 내용이었다. 아파트 앞 골목길 화단에 살던 고양이 화단이. 그 동네에선 꽤 유명한 길고양이란다.
"안녕. 잘 지내니, 나도 오가며 눈도장을 찍었었는데 외출이 뜸한 사이 녀석은 집을 옮겼다. 바로 코앞. 지하철역 입구 자전거 주차장 구석에 새집이 생겼다. 그 역시 화단이를 돌보는 누군가의 손길이리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들여다보며 챙기는 꾸준한 손길이 위태로운 생명 하나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
길고양이를 돌보던 동네 주민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사는 곳은 다르고 처한 환경은 달라도 어쩐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녀석이 앉은 자리는 봄이면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는 자리. 꽃 피는 봄이 오면 추운 얼음눈 대신 따뜻한 벚꽃눈이 펄펄 내릴 것이다. 녀석에겐 멋진 구경이 되겠지. 그러니 그때까지 부디. 지난겨울을 무사히 갈아냈듯이 올해 겨울도 무사히 살아남기를. 꾸벅꾸벅 조는 화단이를 보며 바랐다." -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
4월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산책길에 들어섰더니 벚꽃잎들이 눈처럼 날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벚꽃이 날리는 것을 본 강아지는 정신없이 벚꽃잎을 잡으러 쫓아다닌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고 있는데, 저기 멀리 서 있는 길냥이가 눈에 들어왔다. '저 천지분간 못하는 까불이는 언제 철이 들려나' 하는 표정으로 느긋하게 아기 강아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고양이 위로 눈처럼 떨어지는 벚꽃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때 나도 비슷한 걸 바랐던 것 같다.
'기껏해야 길고양이의 수명은 3년. 태어나 봄을 맞는 건 단 세 번. 너한테는 몇 번째의 봄인지 모르겠지만 부디 이 봄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존재조차 몰랐던 길에서 길냥이들과 길냥이들을 돌보는 이웃들이 남긴 흔적들을 발견하는 건, 일상의 작은 감동이자 즐거움이다. 잠깐일망정 서로를 향한 친절로 이어지니 더 그렇다. 이 책은 이렇듯 우리가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샛별 같은 순간과 인연들을 응시하게 해준다.
"어른이 된 나는 우리 사는 세상이 다정하다고 믿는다.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옆자리 사람이 따스하다고 여긴다. 거리에서 카페에서 지하철에서 관공서에서, 내 곁을 스쳐 가는 수많은 타인에게 잔잔한 애정을 느낀다. 너무도 평범해 보이는 우리는 사실, 누군가의 곁에 잠시 머물다 가는 신일지도, 무표정 속에 날개를 숨기고 걷는 천사일지도 모르니까."
꾸깃꾸깃 넣어두고 잊어버린 기억들도 생각나게 해준다. 예를 들면 처음으로 자전거를 탄 날의 행복이라든가, 비 오는 날이면 어머니가 끓여주신 잔치국수에 대한 기억처럼 "맞아, 나도 그랬었지" 하면서 맞장구치게 되는 구절들도 곳곳에서 만난다.
"우리에게는 언젠가 처음으로 자전거를 탔던 날이 있었다. 넘어질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자꾸만 뒤를 돌아보던 처음이 있었고, 비틀거리던 자전거가 부드럽게 굴러가던 신기한 순간이 있었다. 차릉 차릉 경적을 울리며 자전거를 달렸던 기분 좋은 날이 있었다. 그동안 잠시 잊고 살았을 뿐, 자전거를 타는 일은 이토록 즐겁다."
다정한 길동무 같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르는 지점이 있다.
특별하지 않아서 소소하다 느끼는 일들이야말로 특별하다고. 행복하다고.
"시인 메리 올리버는 '평온한 날씨도 엄연히 날씨이며 보도할 가치가 있다'고 했다. 평온한 날씨에 한가롭게 자전거를 타는 일. 하루의 끝에서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가지는 일.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바람을 느끼는 일. 이처럼 특별하지 않아서 소소하다 느끼는 일들이야말로 나는 특별하다고,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책을 덮을 즈음, 익숙한 느낌이 올라왔다. 생각해 보니, 길냥이를 돌보던 이웃을 만나고 뒤돌아섰을 때 들었던 안도감과 온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