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통 내가 마산사람이라고 말을 하지만, 대부분의 유년시절은 사실 공장이 많은 창원에서 보냈다. 그때는 90년대였고, 당시의 자세한 정책적 배경을 알 수가 없었던 나이였지만, 그저 다른 나라에서 온 노동자들이 많이 보인다는 것 정도를 느끼고 있었다. 요즘에 가만 보면 이주노동자들을 향한 험한 말들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드는데, 오히려 그 시절에는 차별적인 말도 별로 없었고, 그저 '저 친구들이 여기에 일을 하러 오는구나,' 정도의 인식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다른 피부색'의 경계를 넘어서 그이들과 말을 섞거나 어떤 소통을 하려는 일은 여전히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와중에 우리 식구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이 하늘을 찌르는 우리 아버지 덕분에 우스운 일이 많이 있었다. 그 노동자들이 하는 말은커녕 영어도 잘 하지 못하시면서 얼마나 열심히 인사를 하시고 말을 걸려고 하시는지. 언젠가는 동네 약수터에서 자주 마주치던 어떤 동남아시아 쪽에서 온 사람이 우리 아버지만 보면 대화를 하는 것이 너무 귀찮아서 다른 길로 피해서 도망을 갔던 일도 있었다.
내가 대학/대학원을 다니는 동안에도 아버지의 이런 '습관'은 여전했다. 가끔 내가 집에 내려가면, 아버지는 대형마트나 야구장과 같은 공공장소에 가서 외국인을 발견할 때마다 꼭 나를 통역으로 내세워서 대화를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시곤 하셨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외국 사람들도 그게 늘 달가운 것처럼 보이지가 않았고, 나도 정말 피곤하게 느껴져서 "아빠, 제발 진짜 말 좀 그만 걸면 안 될까?"라고 부탁했지만 결국에는 궁금증을 참지 못한 아버지가 어디서 왔냐는 둥의 단순한 영어로 대화를 트고 뒷일은 내가 처리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릴 때(?)는 아버지의 이런 호기심이 너무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다. 이런 게 정말 민폐라는 생각도 했었고, 제발 좀 말을 안 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서른이 훌쩍 넘어서야 내 아버지의 성품인지 습관인지... 정확하게 정의를 내리기는 어려운 이런 부분을 재고하는 계기가 있었다.
내가 케냐에서 연구를 하던 중에 부모님께서 한 열흘 다녀가시면서 있었던 일이다. 초반에 3박 정도는 내가 신세를 지고 있었던 수녀원의 민박시설에 따로 방을 마련해서 머무르고 있었다. 그곳에는 케냐의 다른 지역이나 우간다 및 탄자니아 등의 주변 나라에서 오는 성직자들 및 여행자들이 머무르고 있었는데, 우리가 떠나는 날 아침 짐을 정리하고 나오니 아버지는 누군지도 모르는 두 젊은이와 나란히 앉아 계셨다 (어렴풋이 우간다에서 왔던 사람들로 기억을 한다). 아마 하실 줄 아는 영어를 총동원에서 한국에서 왔다는 정도의 대화를 하시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나를 보시고는 "은아, 이 친구들하고 나하고 사진 하나 찍어도라"고 하셨다. 솔직히, 내 머리와 마음에는 순간적인 부담감이 마구 엄습했다. 연구를 하면서도 그렇게 사람을 직접적으로 찍는 것은 늘 피하는 중이었고, 아프리카를 방문하는 피부가 하얀 사람이 피부가 검은 사람과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 그 행위 자체에 대한 고정관념에 지레 겁이 나서 선뜻 카메라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또 사진을 찍지 않으면 아버지가 맘 상해하실 것 같았고, 가만 보니 두 청년의 표정이 밝아 보여서 할 수 없이 그냥 카메라를 꺼냈다. 그리고 셔터를 누르려던 순간에 나는 아버지가 양 옆에 있는 청년들의 손을 꼬옥 잡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셔터를 누르던 짧은 물리적 시간동안 정말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문화와 대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그저 개인적인 선택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나는 이 호기심 많고 (영어는 짧지만) 소통하기 좋아하는 아버지를 통해 끊임없는 대화에 참여한 덕분에 '훈련'을 받았던 것이다. 아마도 아버지 역시 나를 '개인 통역사'로 쓰면서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궁극적으로는 인류학자로 키우고 있었던 셈이다.
지금도, 아버지와 그 청년들이 손을 잡고 찍은 그 사진은 내 컴퓨터에 엄마 아빠와의 여행이라는 폴더 안에 저장이 되어있다. 몇몇 친구들이 우연히 이 사진을 보고, 너네 아버지 옆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냐고 물었는데, 그냥 웃으면서 "사실 우리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우리 아버지가 언어를 비롯한 너무나 많은 차이를 넘어서 대화를 하고 싶었던 사람들이라고 설명하기는 너무 길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