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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이 Aug 21. 2022

<Ep.7>숨어 있는 이웃을 찾아서

이해할 수 있는 세계와 이해받을 수 있는 세계   

7. 당신의 글은 이해받고 있습니까? 




이과형 인간들을 좋아한다. 그들에겐 내게 없는 게 있다. 명쾌함. 그리고 미해결 문제를 풀려는 노력.

내가 겪어온 이과형 인간들은 대체로 생활 속에서 알고리즘과 플랜 짜는 일에 익숙하다.


또한 그들의 삶엔 어떤 방식으로든 마지막이 있다. 마지막을 두루뭉술하게 남겨두지 않는다. 당장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과정 중에 있는 일들이라면 ‘아직은 답할 수 없는 일이다.’라는 결론을 잠정적으로 내려둔다.      


꽤 오래전에는 블로그를 이용했는데, 알다시피 블로그는 글이 길다. 이웃님들 중에는 일상적 문제에 관한 수식을 한 아름 써놓고 나름의 결론을 제시하는 글들이 있었다. 하나도 못 알아봤다. 수포자 운운은 하지 않겠다.


결론 정도는 알아듣는 경우가 있었지만 과정까지 이해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못 알아봤기에 아름다운 것들도 있다. 전혀 내가 모르는 세상에 살고 있는 머릿속을 구경하는 일만으로도 얼마나 멋진가.    

  

그러면 무슨 말이건 걸고 싶어졌다. 아름다운데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글이면 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솔직하게 가자. ‘멋져요. 하트.’

아니다. 성격상 또 그건 안 된다.

기억나진 않지만 갖가지 말을 끌어와 중얼거리며 쓰다가 왔을 것이다. 오류가 있는 말들이라도 오가다 보면 친해지기 마련. 그저 저 인간은 그런 인간이려니 하면서 말이다.      


몇 년 전, 직장에 전화가 한 통 걸려와 나를 찾는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자기는 규라는 지인인데 전화번호를 가르쳐달라고 했지만 딱 봐도 보이스피싱이라 끊었다고 했다. 그날 저녁에 다시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하루에 두 번. 뭘까. 받아야겠다. 긴장을 바짝 했다.


여보세요.

-저예요. 저 기억하시겠어요?

누구신데요.

-규요.(본명)

네?

-아니, 룬이요.(블로그 이름)

아. 뭐야.

푹 웃음이 터졌다.      


그 블로그 이웃은 이과형 수재답게 조금 집요한 데가 있었다. 글을 쓰다 무심결에 예전 만화방 이름을 언급했는데, 그걸 검색해서 우리가 동향 사람인 걸 알아냈다. 그러므로 다른 경로로 내 전화번호를 알아내는 일 따위는 별 일 아니었었나 보다. 아직도 한국의 개인정보 보안은 취약한 모양이었다. 


    


한참 어린 그 이웃님과 헌 책방에 가서 연애 고민 같은 걸 서로 나누며 논 적이 있었다.

한참 헛소리를 해대는 나를 그 친구는 물끄러미 봤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했다. 그가 했던 말 중 유일하게 정확히 알아들었던 말이기도 했다.


“그러면 감정을 잘 알아차리는 사람이 편할 것 같아요? 아니면 무던하고 감정 기복 없는 사람이 편할 것 같아요?”


그 질문은 내 속에 오래 남았다. 나를 알아주는 질문 같아서 그랬을 거다.  내 곁에 어떤 한 남자가 머무르고 싶다고 말하는 날에,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곤 했다.



한편,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그이가 내게 전화한 까닭은 이거였다. 내가 오래전 이런 덧글을 남겼다고 했다.

‘서른 살이 기대되는 사람. 그때 어디서 뭐 하고 있는지 꼭 알려줘요!’

맙소사, 그게 이 난관을 거쳐 연락한 이유라니 당신답다. 상대적으로 기억이 나지 않아 내가 그랬느냐고 반문했더니, 닫아두었던 블로그를 다시 열어 확인까지 시켜주었다. 모니터를 통해 함께 그가 사는 곳의 경치를 봤다. 평화로웠다. 


들키지 않게 눈물이 찔끔 났다. 왜 울었냐고? 그가 영영 미국으로 가버려서? 나이 차이가 있다지만 연애라도 해볼 걸 아쉬워서? 맞다.

 ...농담이다.



그날 헌 책방에서의 내 대답은 ‘무던한 사람’이었다. 나의 예민함을 감추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었던 나는 그냥 좀 바보였다. 평화롭긴 하지만 가끔은 외로워질 가능성 역시 어쩔 수 없다. 그 외로움은 생각보다 커서 사람을 울적하게 만든다.


내 대답에 대한 그 이웃님의 반응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나를 알고 있었던 거다.  


<드라이브 마이 카>라는 영화에서 다카츠키는 상처 받고 진실을 회피하는 가후쿠에게 이렇게 말한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싶다면 자기 스스로를 먼저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진실로 타인의 마음을 보고 싶다면 자기 자신을 똑바로, 깊이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이해할  있는 세계와 이해받을  있는 세계란 마치 빙빙 돌며 공존하는 행성들이. 그러므로 어차피 정확히 서로를 이해하는 건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요즘도 글을 읽고 쓴다. 의미 없는 말들을 뱉기도 하고 뱉고 보니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말일 때도 있다. 내가 그러한 것처럼 사람들도 글을 읽으면서 각자 다른 생각을 할 것이다. 제대로 읽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니기도 하다. 상관없다.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전달되는 글이 좋은 글이라 배웠다. 

오늘의 결론은 이렇게 내려볼까 한다.  당신은 당신이 이해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 된다. 나머지는 읽는 사람의 몫이다. 적어도, 그렇다. 


-220817. 끝-



좋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당신을 지지하는 세계의 글귀 - @tae.i22 에서도 자주 소통해요! 

박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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