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정한 태쁘 Dec 04. 2024

김장독립!!!!!!!!!!!

내년엔 기필코 김치를 사먹겠어

침을 맞았다. 어깨부터 허리까지 통증이 밀려와, 한의원 침대에 누워 있으니 생각이 많아졌다. “300포기.” 이 숫자가 내 몸에 남긴 흔적이 이토록 클 줄은 몰랐다. 누가 들으면 “시댁에서 식당이라도 하세요?”라고 물을 법하다. 하지만 요즘 식당도 이렇게 많이 담그진 않는다지 않은가?


우리 어머님은 베푸는 걸 좋아하시는 분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랑을 나누는 걸 삶의 방식으로 삼으시는 분이다. 결혼한 지 10년째, 그런 어머님의 마음에 큰 혜택을 받고 살았다. 아직도 일하는 며느리가 짠하다며 아이들 미역국, 소고기국은 냉동실에서 떨어질 날이 없다. 이유식팩에 깔끔하게 포장된 국을 아침마다 전자레인지에 돌리며, 나는 어머님께 감사의 묵상을 한다.


“시어머니가 친정엄마 같아 좋겠다”라는 친정엄마의 말에 모든 것이 설명된다. 그런 어머님이 올해도 어김없이 김장을 시작하셨다. 다만, 작년보단 줄었다. 450포기에서 300포기로.


손 작은 나와 손 큰 어머님

나는 손이 작아도 너무 작다. 필요한 만큼만 사고 쓰자는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한다. 쓸데없는 물건을 할인이라고 쟁이지도 않는다. 그러니 300포기 김장은 내 세계관으로는 이해 불가다. 하지만 어머님은 다르다.

“서울 집으로 보내고, 전주 집으로 보내고, 이쁜 며느리 친정에도 보내야지.”

이 말이 어머님의 철학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나눔과 베풂의 철학. 어쩌면 우리가 잘되는 건 어머님의 은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현생에서 내가 베풀면 그 덕이 자식들에게 간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어머님은 아들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베푸시는 걸까? 아니면 사랑받고 자라지 못한 시절을 지나쳐온 자신을 보상하는 걸까? 그 마음을 헤아리다 보면 “김장독립”이라는 외침이 목구멍에서 걸려 멈춘다.


김장의 전사들

김장은 가족 행사라지만, 사실 어머님의 무대다. 배추를 심고, 절이고, 꼬박 4일 동안 김치를 담그는 투혼을 발휘하시는 어머님은 거의 전투의 지휘관 같은 존재다. 척추 협착증으로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는 분이 이 모든 과정을 감내한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김장날도 나름 축제 같았다. 보쌈도 먹고, 맥주도 마시고, “도와드려야지” 마음먹으면 애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나서 “들어가서 애나 봐라”라는 말에 얼씨구나 들어갔다. 제사도 없고, 김장도 구경꾼 수준이라 힘든 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아이들이 더 이상 엄마를 찾지 않는다. 그리고 김장팀의 평균 연령을 낮추는 건 이제 나다. 나보다 젊은 전사는 없다.


김장을 하면서, ‘할거면 제대로 하자‘가 내 성격아니던가. 팔을 걷어붙였다. 다음 날은 김장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롤러장에서 아이들의 에너지를 받아내다가 쓰러졌다. 온몸이 아파 침을 맞고 물리치료를 받고, 부항까지 뜨며 누워 있던 그 순간, 마음속에서 결심이 섰다.


“김장독립을 해야겠다.”


하지만 김치가 너무 맛있다

어머님의 김치는 단순히 발효된 채소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 정성, 그리고 온몸의 통증이 녹아든 작품이다.


김치를 한입 먹으면, 내가 왜 이 고생을 했는지 이해가 된다. 그리고 어머님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이 김치 맛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그 간절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래서 내년 김장날이 떠오른다. 아니, 캘린더에 벌써 표시를 해버렸다. 김장독립은커녕, 내년에도 어머님 옆에서 김치를 버무리고 있을 나 자신이 선명히 그려진다.


김장은 사랑이다. 독립은 잠시의 망상일 뿐.


김장독립을 외치며 결의에 찬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님이 베푸는 김치의 맛과 그 마음을 떠올리면, 독립은 그저 헛된 외침처럼 느껴진다. 나는 어쩌면 사랑이라는 마음을 한 숟갈 먹은 것이다.

물론, 내년에도 몸이 아플 거라는 건 자명하다. 침을 맞으러 또 한의원에 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이번에도 깨닫고 말았다.


김장은 단순히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가족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랑을 나누는 행사다. 김장을 하면서 어머님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하고, 나 역시 더 성장한다.


김장독립? 아마 내 인생에서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내년에도 나는 어머님 옆에서, 사랑과 정성으로 김치를 담그며, 김장이라는 이름의 축제에 다시 참여하고 있을 것이다. 어머님의 김치 한입에 무너지는 나의 결심처럼.


”얘들아, 김치 버리면 호온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